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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쉬케크는 중앙아시아 여행의 적응기간을 갖기 위해 잠깐 머무는 도시라 생각하고, 첫째날은 늦게 일어나 시내 마트나 좀 다녀오고 환전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주원이가 장시간동안 걷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5살이지만 유아차를 끌고 나갔다. 그런데 유아차를 끌기에 비쉬케크의 도로사정은 매우 불편했다. 일단 차도의 경우 버스가 다니는 주요 도로는 아스팔트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그 외 집과 주요 도로 사이를 연결하는 차도는 모두 흙길이었다. 유아차가 한번 지나가기만 해도 흙먼지가 잔뜩 일어났는데, 자동차가 지나기라도 하면 흙먼지를 들이 마실까봐 벽쪽으로 몸을 돌려 흙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흙만 있으면 다행인데, 통일 안 된 자연 그대로 크기의 돌들이 너무 많았다. 울퉁불퉁 유아차는 도로 위에서 춤을 추었다. 흙길을 지나 주요 인도로 진입한 이후에는 그나마 정비된 인도가 살짝 나왔지만, 그마저도 일정하게 유지되지는 않았다. 가게나 식당 앞 인도는 시멘트나 보도블럭으로 처리된 곳도 있지만, 사이 사이 인도는 거의 전쟁 폭격을 맞은 듯한 수준이었다. 인도나 차도나 정비되지 않은 곳이 많고 돌들이 튀겨서 그런 것일까? 키르기즈스탄에는 흙을 뒤짚어쓰거나 자동차 앞유리가 깨진채 다니는 낡은 자동차들이 많았다. 

 인도에 갑자기 구멍이 있거나 균열이 있을 때마다 엄마는 "턱 조심!"하고 외치며 말했다.

 "내가 만약 돈이 있다면 여기 비쉬케크에 인도 정비를 쫙 해주고 싶네."

비쉬케크 주택가 길거리

 만약 우리가 유아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할 불편함이었다. 문득 인천공항에서 비쉬케크행 비행기를 발권할 때 옆 줄에 있던 이식쿨 휠체어 대장정팀이 떠올랐다. 아니, 유아차도 이렇게 끌기 힘든데, 그 분들은 잘 추진하고 계시려나. 이 글을 쓰는 지금 찾아보니 인터넷 뉴스에 [최창현 밝은내일IL종합지원센터 대표, 키르기스스탄 이식쿨호수 500km 도전 성공]이라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거친 인도와는 달리, 비쉬케크 도시 전체에는 아름다운 장미정원이 정말 많았다. 장미정원 조차 키르기즈스탄에서는 자연미가 넘쳐 흘렀다. 장미를 심긴 심었되, 자연 그대로 끼어드는 잡초와 장미덩쿨의 제각각의 크기를 인정하는 느낌이랄까? 유아차도 지치고, 우리도 지칠때면 나오는 물기 가득한 장미정원에서 한숨 돌렸다 갔다. 

 

 둘째날 성제오빠는 점심 시간에 우리 숙소에 찾아왔다. 성제오빠는 키르기즈스탄에서 말을 타다 떨어져서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간다고 했다.  비쉬케크 시내에 가보면 북한 한의원이 있는데, 그곳이 그렇게 용하다고 하였다. 저번에 성제오빠는 말에 떨어져서 몸 한쪽이 마비가 오는 증세가 있었는데 몇 번 침치료를 받고 나서 깨끗하게 나았다고 했다. 그 말에 한의학 치료를 선호하는 엄마가 따라나서기로 했다. 북한 한의원은 오르토사이 바자르 (Ortosay)에서 걸어서 약 17여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였는데  동(東)의원이라는 뜻의ЦЕНТР ВОСТОЧНОЙ КОРЕЙСКОЙ МЕДИЦИНЫ

이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왜 한의원이 아니고 동(東)의원일까?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북한에서는 한의사를 동의사로 부르는 듯 했다.

네이버 사전 캡처
자유아시아방송 신문기사 캡처

 실제로 북한에서 귀순한 백년한의원 석영환 선생의 경우 북한에서는 동의사로 일하다가, 귀순한 뒤 한국의 한의사 자격증을 따는데 3년을 보냈다는 기사가 나있었다. 동양의 의학이라는 뜻에서 서양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동의학이라고 부르는거라고 추측해본다. 

 중국에서 북한 음식점은 많이 가보았지만, 음식점 외에 의료원 형태로 대외적으로 북한을 만날 수 있는 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였다.  북한 의료원이 있다는 것은 북한 사람들이 키르기즈스탄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뜻인데, 구글에서 찾아보니 북한사람들은 키르기즈스탄에 무기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소련때부터 이어오는 외교관계가 존재하는 듯 하였다. 

북한 한의원 홈페이지(https://vostokmed.kg/)

 북한 한의원에서는 남자 선생님들 몇 분이 교대로 근무하시는 듯 한데, 성제오빠가 손 침치료를 받았던 선생님은 평양으로 잠깐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엄마는 여행 초반이라 아픈데가 딱히 없어, 전반적인 상태에 대한 점검을 받기로 했다. 

 "저희 부모님도 북한 쪽 지역 함경도 북청 출신이에요."

 진료받던 엄마가 진지한 북한 의사 선생님에게 아는 척 하자, 안경을 쓴 북한 선생님은 표정은 무뚝뚝했지만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엄마는 전반적으로 기가 약하고 혈압도 높지 않아 몸이 차다고 하여, 등을 탈의하고 부항을 뜨는 사이, 성제오빠는 옆방에서 선생님과 담소를 나누었다. 성제오빠는 정말 친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듯 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진료가 끝나고 묻자, 북한에서 버섯을 재배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엄마는 북한 사람은 처음 만나본다며, 그것도 북한 의사에게 진료받은것만 해도 중앙아시아 체험은 끝났다며 너무 행복해하셨다. 핸드폰을 꺼내 엄마 친구들이 잔뜩 있는 단톡방에 북한 한의사 만난 것을 자랑하였다. 

 

 2시간이나 걸린 치료가 끝나고 성제오빠와 엄마는 오르토사이 시장에서 저녁거리를 구입했다. 시장 한 길가에는 수로가 있었는데, 물이 콸콸콸콸 힘차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장 내 작은 수로였을 뿐인데, 회색빛 둔탁한 물이 마치 설산에서 내려오는 물 같았다. 날은 덥고 물은 신선해보이고... 성제오빠가 수박을 사러 간 사이, 엄마는 수로에 걸터앉아 발을 담궜다. 그런데 순식간에 엄마의 슬리퍼는 수로의 힘찬 물살을 타고 없어지고야 말았다. 

 "성제씨. 어떡하죠. 제 슬리퍼가 떠내려갔어요."

무거운 수박을 들고 온 성제오빠에게 수로에 걸터앉은 엄마는 겸연쩍게 말했다. 시장 한복판 수로에 걸터앉아 발담그기 놀이를 한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별 사람, 별 순간을 다 겪어본 성제오빠는 표정 변화도 하나 없이 수박을 엄마옆에 내려놓았다.

 "괜찮아요. 여기 신발 쌉니다.  500솜만 줘보세요."(2022.09.22기준 환율로 약 8997원 정도) 

 성제오빠는 긴 다리로 터덜터덜 수박을 사가지고 온 길을 되돌아갔다. 20분 뒤 돌아온 성제오빠의 한 손에는 500솜은 그대로 있었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엄마의 잃어버린 슬리퍼 한짝이 들려있었다.

  "제가 요즘 좀 이상해요. 물건이 자꾸만 잘 찾아지네요."

  성제오빠는 200솜을 들고 엄마 슬리퍼를 사러 가는 도중, 갑자기 수로를 따라가고 싶었다고 한다. 수로를 따라 10여분을 걸어내려가다보니,  수로 중간에 나뭇잎이나 쓰레기를 거르려고 철사로 된 망이 있더란다. 거기 두둥실 걸려 물살에 춤추고 있는 쓰레기 중 하나가 엄마의 슬리퍼였다고 한다. 

 

 저녁에는 성제오빠의 호스텔에 묵는 친구들과 여사장님이 우리 에어비앤비를 찾았다. 나는 한국에서 가지고온 춘장을 볶아 키르기즈스탄 현지 야채들을 송송 썰어 짜장 한 솥을 끓이고, 밥을 안쳤다. 미역귀를 넣은 구수한 미역국도 한 사발 끓였다.  시장 고려인 가게에서 파는 것처럼 당근을 송송송 썰어 소금에 절이고 식초와 설탕을 가미하여 당근김치를 만들었다. 체리와 수박, 멜론, 오이를 썰어 쌈장과 배치하니 순식간에 그럴싸한 손님 한 상이 마련되었다.

 "한식이라 다들 좋아하려나요?" 내가 걱정하자 성제오빠는 키르기즈스탄에서는 한식 자체가 현지 물가 대비 비싸기 때문에 한식을 먹을 기회가 별로 없다며 다들 좋아할 거라고 안심시켜주었다. 

 내가 묵고 있는 에어비앤비에는 소분할 접시가 별로 없어 손님들이 호스텔에서 그릇이며, 식기며 각자 챙겨왔다. 성제오빠가 묵고 있는 호스텔의 여사장님은 70대의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였는데, 삐쩍 마른 몸을 펑퍼짐한 옷으로 가리고 있었다. 머리에는 히잡은 아니었지만, 스카프로 단정하게 묶었다. 할머니는 키르기즈스탄의 의사였으나 지금은 은퇴하고 딸 아들 모두 시집장가 보내고 젊은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따뜻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중이라고 했다.

 성제오빠가 데리고 온 또다른 러시아 남자는 IT업계에 종사 중인데 러시아 전쟁을 피해 키르기즈스탄에 와이프와 함께 도피하여 호스텔에서 컴퓨터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어를 전공하는 수줍은 키르기즈스탄 여학생과 영어를 잘 하는 장기 투숙하는 키르기즈 남학생도 왔다.  독신인 성제오빠는 종종 외로움을 느낀다고 했는데, 호스텔에서 온 손님들을 보니 호스텔 도미토리 안에서는 북적거려서 외로울 새가 없을 듯 했다. 

에어비앤비를 찾아준 손님들

 나는 러시아어를 못하고, 손님들은 영어를 못하고, 성제오빠는 통역하기 귀찮아했다. 손님들이 성제오빠가 통역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나를 바라보며 열 마디 하면, 성제오빠는 나에게 아주 짤막하게 통역해주고, 다시 차린 음식을 열심히 먹었다. 

 "맛있대"

 "좋대."

 "고맙대." 

 나중에는 통역도 안 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 눈치로 알아들었지?"

나도 통역으로 몇 년간 회사에서 밥 벌이 한 사람이라 통역이 귀찮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성제오빠는 오랜 해외생활 끝에 통역하는 것에 넌더리가 난 모양이다. 중간자 역할로 말을 제일 많이 할 것으로 생각되는 성제오빠는 밥먹느라 바쁘고, 엄마와 주원이는 겉돌고, 나도 영어가 안 통하자 말이 없어지고, 손님들은 낯가렸다.

 분위기가 조용해졌다는 것을 인지한 성제오빠는 키르기즈스탄 전통악기 코무즈를 꺼내들었다. 코무즈는 기타처럼 생긴 현악기로 현이 3줄이었다. 성제오빠는 배낭여행으로 짐도 많을 텐데, 옷은 몇 벌 안 가지고 다니고, 코무즈는 꼭 챙겨 다니고 있었다. 성제오빠는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으로 코무즈를 연주하며, 성제오빠의 굵은 목소리로 전통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손님들과 엄마는 진지한 성제오빠의 노래를 각자 스마트폰을 꺼내 동영상으로 찍기 시작했고, 70대 여사장님은 키르기즈스탄 전통 노래를 하는 외국인 성제오빠를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5살 짜리 주원이는 노랫소리에 잠깐 고개만 돌렸을 뿐, 에어비앤비 주인집 손자들하고 잔디밭에서 미니축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성제오빠의 전통노래는 장중하고, 그윽하고, 슬펐으며, 길고 지루했다. 노래가 끝났을 때 장내는 조용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성제오빠는 이윽고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다음 너도 한곡 해야지."

성제오빠의 코무즈

 회사 신입사원 때 노래방 가서 불렀을 때 빼고는 누가 나를 노래시킨적이 없었다. 그런데 성제오빠가 시키네?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낯선 장소에서 그것도 퇴사하고 키르기르스탄에서 장기자랑을 할 줄이야. 나를 선두로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은 노래를 한 곡씩 하게 되었다. 나는 곰세마리와 첨밀밀을, 러시아 남자는 성제오빠 못지 않은 지루한 전통 러시아 노래를, 엄마는 팔을 휘휘 저으며 아리랑을, 키르기즈 여학생은 최신 일본 노래를 하고 나니 30분이 훌쩍 가있었다. 마지막 70대 여사장님 차례가 되자 사장님이 내빼실줄 알았는데, 이게 왠걸. 성제오빠 못지않은 전통 키르기즈스탄 노래를 전통 발성으로 한 곡 쭉 해주셨는데, 그 발성이 정말 초원에서 독수리를 부르는 듯, 깊고 날카롭고도 아름다워서 박물관에서 트는 전통 공연 동영상처럼 느껴졌다.

 노래가 끝나고 다시 대화 시간이 되자 다들 말이 또다시 없어졌다. 따뜻한 차와 함께 눈빛으로 서로 인사를 하고, 따뜻한 포옹과 함께 잔치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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