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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사람들을 만나면 옛날 얘기를 하게 된다. 우리 남편도 초등학교 때부터 만난 친구들과 만나면, 어릴 때 자기 담임이었는데 교회집사님이기도 해서 아이들을 교회로 인도했던 담임선생님 얘기를 아직도 한다. 대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대학교 때 얘기를,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고등학교 얘기를 하게 된다. 말하다 보면 그때 그 시절의 영혼이 슬그머니 나이 든 나의 몸을 뚫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친구들의 몸에서 나온 어린 영혼들을 만난다. 그러다 보니 아이비에커의 20대 영혼도, 나의 20대 영혼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여름방학때 기숙사에 혼자 남겨진 나에게 뜬금없이 찾아온 아이비에커는 생각하지도 못한 변수였다. 23살이던 나는 그때까지도 단 한 명의 남자와 사귀어본 적이 없었는데, 실적과는 달리 결혼 전까지 7명의 남자와 만나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서북대학교 운동장에 나란히 앉아 운동장에서 뛰는 중국학생들을 구경하던 여름방학 어느 밤 아이비에커가 갑자기 손으로 내 턱을 쥐고 흔드는 장난을 하다가 갑자기 자기 쪽으로 내 턱을 당겨 입맞췄을 때, 나는 얼었다. 이게 뭐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미간을 세우고 눈이 커지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상태로 얼어붙어있었다. 그때 그의 두 번째 입맞춤이 다가왔다. 나는 판단이 느렸다. 얘를 밀치고 벌떡 일어나 도망가야 할지, 아니면 이 나이에 의례 경험하는 일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몰라 입술을 앙 다물고 있었다. 답답한 아이비에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입을 이렇게 벌려봐. 나처럼" 그러면서 그는 '아'하고 자신이 시범을 보였다. 그의 혀가 내 입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놀랐지만 이게 바로 TV에서 보던 키스구나, 얘는 이런 걸 해봤나보다, 나도 세상에 유학하다 이런 경험을 하다니, 하며 그저 그가 다가오는 것을 제삼자처럼 관조하고 있었다.
 그날 밤 드디어 첫키스를 한 나는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부모도 없는 타지에서 공부에 열중해야 할 시기에 경험하게 된 키스는 어린 나에게 봤을 때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또 다른 일에 휘말리기 전에 당장이라도 귀국해야 하나, 아니야. 회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그냥 없었던 일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하며 공부나 하자... 그다음 날 3층에서 친구들과 교실을 나오고 있는 아이비에커를 봤을 때, 나는 그와 마주칠까 봐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어쩔 줄 몰랐던 건 아이비에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도 놀랐는지 같은 기숙사 살면서도 며칠이나 나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풋풋했던 20대의 일이었다. 잊고 있었던 모든 기억들이 아이비에커와 이야기를 나누니 내 뇌 속 꽁꽁 잠가놨던 서랍장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 너 귀국하고서 1개월인가 절대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을 때, 나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어. 호흡도 안 되었고,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정도였어."
 아이비에커는 지난날 나에게 받은 상처가 생각났는지 말했다. 
 "음... 솔직히 말할까? 나는 그때 너한테 너무 화가 나있었어."
 아이비에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우리의 순수했던 사랑을 떠올리면 미소가 지어지는데, 너는 화가 났다니. 옛날 기억은 즐겁게 기억해야지."
 "아니, 니가 궁금해하니까 하는 소리야. 그때 왜 내가 연락이 없었는지 말하지 않았었잖아."
 "도대체 왜 그 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건데."
 "야, 지난날인데 기억도 안 난다. 됐어."
 아이비에커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말해. 말하라고."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너가 아무런 계획이 없었으니까. 결국, 내가 연락 안 한 게 아니야. 네가 나를 포기한 거야. (是你放弃我的)."
 나는 밥 먹이다 말고 손가락으로 아이비에커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안의 나쁜 년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분명 타슈켄트를 떠나 히바,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여행하면서 다짐하지 않았나. 그를 다시 만나면 사과하겠노라고, 고마웠다고 말하겠노라고. 그런데 갑자기 나 입에서 나온 말에 내 자신도 흠칫했다. 
  나는 4년동안 줄기차게 보내온 그의 이메일에 불성실하게 답변해 왔다. 그가 한국친구들을 모두 동원해서 전화 와서 연락해 달라고 했을 때도, 아직도 연락 오는구나 생각하며 부담스러워했다. 이메일은 야후메신저로, 스카이프로, 카카오톡으로, 페이스북으로, 텔레그램으로 바뀌는 동안 그는 나를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잘 지내냐고, 우리 너무 멀어졌다고... 그런데도 무관심했던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네가 나를 포기한 거야. 
 나의 무의식은 죄책감과 미안함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를 무시하고 그에게 상처주었던 지난날들에 내가 아파하지 않고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잘 살아왔는데, 정작 15년 만에 갑자기 만나 융숭한 대접을 받으니 사실 미안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왜 그동안 연락 안 했냐고 아이비에커가 지난날을 물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니 나라가 선진국이 아니라서, 네가 전망이 없어 보여서, 네가 읽어보라던 코란을 읽어볼 생각이 없어서... 나는 솔직할 수 없었다. 
 아이비에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가 연락을 안 한 거잖아. 무슨 말이야."
 "어차피 내가 계속 연락했더라도 넌 나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나야 말로 너가 연락 오길 기다렸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기다린건 나야. 네가 계획이 있기를 나는 기다린 거지. 우리가 헤어졌을 때 네가 뭐라고 했어. 우리 또 언제 만나 도리어 나한테 물었잖아. 네가 나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싶은지 너는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았잖아. 너는 그냥 연락만 하고 싶어 했잖아."
 아이비에커의 눈시울이 순간 붉어졌다. 
 "왜 그런 생각을 너는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혼자만 생각하면 다야? 니가 나한테 물어봤었어야지. 나의 계획을. 그랬다면 나는 바로 너한테 내 계획을 얘기했을 텐데."
 "니가 계획이 있길 나는 줄곧 4년을 기다렸어. 우리 난징에서 만나서 헤어질 때 네가 뭐라고 했어. 네 부모가 무슬림이 아닌 여자는 안 된다고 했다면서. 아니야?"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어. 나는 너랑 결혼하고 싶었어."
 "마음은 하나도 안 중요해. 행동이 중요하지. 너한테 그런 얘기를 듣고 나서 나도 지금 남편을 만난거야. 네가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너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거고."
 나의 나쁜년은 거침없이 대사를 뿜어댔다. 20대의 나한테 빙의라도 된 듯싶었다. 이성의 끈을 풀어버리고 포효하고 있었다. 
 "무슬림은 거의 다 부모가 안배해준대로 결혼하잖아, 안 그래? 나 사마르칸트에서 어떤 우즈베키스탄 청년을 마주쳤어. 걔도 한국여자랑 사랑에 빠져서 한국에서 유학까지 하면서 5년이나 만났는데 결국 엄마가 반대하니까 헤어졌다더라. 사실 나는 알고 있었어. 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내가 대학생 때 한국에서 인도까지 육로로 여행했잖아. 근데 그 여정에서 우리 유학하던 서안을 들르게 되었어. 그때 우리 같이 유학했을 때 파키스탄학생 누르하고 바짓 알지. 걔네들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바짓이 자기네 방에서 중국여자랑 동거 중이더라? 그 중국여자가 우리랑 같은 침대에 자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리에게 물었어. 언니 바짓이 저랑 결혼할까요? 우리는 알고 있었지. 그냥 중국여자는 동거 중인 거고, 바짓은 이미 모국에 부모가 안배한 약혼할 여자가 있다는 걸. 그래서 나도 알게 되었지. 아마 나도 바짓의 그 중국여자친구랑 다르지 않다는 걸."
 아이비에커가 말을 잃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입을 드디어 뗐다.
 "너는 왜 혼자 생각하고 나한테 말을 안 해?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왜 나한테 묻지를 않아."
 "됐어. 다 옛날 얘기다."
 아이비에커와 내가 중국어로 서로에게 레이저를 발사하며 한참 얘기중일 때 주원이가 말했다.
 "엄마 저 똥마려워요."    
 "얘 똥마렵다네. 화장실 좀 다녀올게."
 주원이가 대변을 누고 밖을 나오니 아이비에커가 이미 계산을 다 하고 나와있었다. 
 "갈까?" 
 그는 대화가 갑자기 끝난게 아쉬웠던지 나를 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는 치~ 하며 웃었다. 

 나는 아이비에커와 잘 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면서 도대체 왜 그랬을까. 솔직히 말해서 묻고 싶었던 건 딱 하나였다. 네가 나를 그저 임시 연애하는 대상으로 생각했었는지, 아니면 진짜 사랑했던 건지... 무슬림을 이해하고 나니, 무슬림에서는 부모의 허락이 없는 연애는 모두 하람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나에게 한 모든 행동은 하람에 속했다. 그가 나를 이용한 건지 아니면 그의 진심을 내가 왜곡한 건지 딱 그게 알고 싶었는데, 속마음과 달리 말이 이리저리 빙빙 튀고, 그의 탓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터무니없었다. 그가 나를 깊이 생각했든, 얕게 생각했든 그게 뭔 상관인가. 어차피 나도 그와 결혼까지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킨십에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대학생 때도 모든 만남은 이 사람과 결혼해서 적합할지 판단하고 만났다. 그가 결혼까지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다가와 스킨십을 한 것이라면 내 판단 하에서는 그는 나를 이용한 것이었다.  

 말을 빙빙 돌렸지만, 이제야 아이비에커와 말을 좀 나눈 느낌이었다. 오늘 이 순간은 우리의 만남에서 어떻게 기억될까. 사실 아이비에커는 나에게 과거의 인물일 뿐이었다. 그런 과거의 인물이 내 앞에 살아숨쉬고, 또 다른 추억이 생긴다는 게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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