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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가는 골목길 한복판에 설치된 간이 탁구대에서는 탁구게임이 한창이었다. 소년들은 자전거를 타고 주위를 뺑뺑 돌며 어른들의 탁구시합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걸 보니 오늘은 이드 알아드하를 기념하여 주민들이 모인 게 아닌가 싶었다. 유아차를 끌고 지나가려는데, 탁구 치던 남자 중 곱슬머리 남자가 영어로 우리를 불렀다.
"여행객이신가봐요! 우리 이따 저녁 9시에 플로프 다 같이 먹을 건데 오세요."
조리시간은 무려 3시간, 오래걸리는 플로프
저녁 6시인데, 플로프파티는 9시란다. 플로프는 이미 야외에 설치된 드럼통 위 얹어진 큰 솥에서 팔팔 끓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플로프는 볶음밥인데, 아무리 많은 양의 볶음밥을 만들어도 그렇지 무슨 볶음밥 하나에 3시간이 걸린단 말인가. 우즈베키스탄에서 마주친 요리들은 한결같이 조리시간이 오래 걸렸다. 3월의 나브로즈 때 먹는 수말락은 무려 18~24시간 동안 계속 저어주며 만든다고 하니, 이 사람들 기준에서 3시간 걸리는 플로프는 조리시간이 짧은 것일 수도 있겠다.
플로프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인지 찾아보니 볶음밥과 조리방법에 큰 차이가 있었다. 볶음밥은 밥은 미리 해놓고, 야채를 썰어 볶고 거기에 다 된 밥을 투입해서 볶는 반면, 플로프의 경우 솥에다가 튀김할때처럼 기름을 솥에 흥건히 부운 상태로 고기를 튀기고, 그다음에 양파와 당근, 향신료 등이 부재료를 볶고, 그 후 '생쌀'을 부운 뒤 물을 붓고 쌀이 밥이 될 때까지 가열한다. 즉, 밥을 따로 하지 않고, 생쌀이 밥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 걸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밥을 '볶는'과정은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볶음밥이 아니다. 하지만 맛은 기름과 소금의 조합으로 인해 볶음밥 그 자체다.
플로프는 분명 고기가 잔뜩 들어간 음식인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오늘도 고단한 하루를 보낸 나는 망설였다. 20대일때는 백지상태로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지만, 30대 이후부터는 나와 맞는지 맞지 않는지 판단하고 시도도 안 해보고 내치는 경향이 굳어졌다. 생각 같아서는 호스텔에서 더위에 뒹굴던 몸을 씻은 후 침대에 드러누워 한 발짝도 떼기 싫었지만, 이렇게 하나 둘 제치다가는 현지인들과 소통도 안 해보고 그저 겉핥기관광으로만 머물다 갈 것 같았다.
오후 9시가 되어 숙소에서 다시 마을 골목길로 나오니, 놀랍게도 플로프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 우즈베키스탄은 여름에 너무 덥고, 8시 30분 이후에나 일몰이 찾아와서 그런지 사람들이 밤에 노는 것에 아주 익숙해보였다. 오후 9시에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여유만만했다. 새벽까지 놀 기세였다. 우리가 나타나자, 남자들이 나무의자에 주르르 앉아있다가 자리를 비켜주고는 우리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파티에 초대해 준 기념으로 초르수 시장에서 산 듸냐를 건네니, 아까 우리를 초대한 곱슬머리청년이 나타나서 듸냐를 모두 잘라왔다. 그의 이름은 루슬란이었다. 매우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는데, 발화 속도도 빠르고 심지어 문법도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루슬란은 알고 보니 유럽 사람들의 여행가이드였다. 그는 여행사에서 일하는데, 유럽 여행객들이 모험을 위해 중앙아시아에 오면, 유럽 여행객들을 데리고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을 왔다 갔다 하며 전체 일정을 책임진다고 한다. 루슬란은 이번에 타슈켄트에 있는 것도 4개월 만이라며, 얼마 머물다가 다시 업무로 인해 타슈켄트를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여행 가이드여서 그런지 우리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도, 플로프는 무엇인지, 타슈켄트의 문화는 어떤지 줄줄이 설명했다. 아이가 무려 4명이 있다고 했는데, 자기 와이프가 시어른들과 같이 산다고 했다. 4개월이나 집에 안 들어오는 남편, 시어른들과의 동거, 4명의 아이들... 루슬란의 와이프와 큰 문제가 없는 걸 보니 현지 여자들은 이런 상황을 순응하는 듯 했다.
의자에 앉아 주변을 돌아보니 이 골목의 플로프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은 죄다 남자였다. 심지어 어른 옆에 모여있는 아이들도 다 남자아이들이었다.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가고, 마을 골목길에는 남자들 밖에 없을까. 루슬란에게 물어보니, 여자들은 어느 집에서 다 같이 모여 밥을 먹고 있다고 한다. 원한다면 우리를 거기에 데러다 줄 수 있다고 했지만 분명 거기 가면 영어가 안 통할 것이 뻔했다. 이 골목길에서도 루슬란 말고는 영어 구사자가 한 명도 없었다.
나무의자에는 우리 말고도, 이 골목의 최연장자로 되어 보이는 남자어르신이 앉아있었다. 이 어르신은 부인이 없는지 자꾸 우리 친정엄마에게 관심을 보였다. 루슬란에게 통역하라고 하고는, 엄마에게 우즈베키스탄 어떠냐고, 우즈베키스탄 남자 어떻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또 사진찍을 때는 덥석 엄마의 손목을 잡았다. 세상에... 이제는 엄마까지 찝쩍거림을 당하는구나. 어르신이 너무 들이대자, 루슬란은 아무래도 어르신이 아까부터 술을 많이 드셔서 취하셨다고 귀띔한다.
플로프는 9시 30분이나 되서야 완성되었다. 솥을 덮었던 접시를 벗기니 생쌀이 노랗게 밥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배부르다고 아주 조금만 먹고 갈 거라고 했는데도 주원이, 엄마, 그리고 나까지 1인당 1 접시를 퍼줬다. 그리고 우리가 채식주의자라고 했는데도, 양고기를 듬뿍 담아주고는, 큰 접시에 플로프를 잔뜩 담아가지고 자기네들은 숟가락 없이 손으로 먹기 시작했다. 저 기름진 플로프를 손으로 먹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접시에서... 문득 아이비에커랑 카페에서 밥먹을 때 아이비에커가 나에게 자기는 중국어로 손으로 먹는 밥(手抓饭)을 먹겠다고 얘기한게 떠올랐다. 플로프는 본래 손으로 먹는게 전통이었다. 외국인인 우리에게는 특별히 플라스틱 수저를 가져다 주었다.
고기가 잔뜩 얹어진 밥이지만, 외국인들에게 마음을 여는 호의가 고마웠다. 남기는 것은 주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우리는 다 먹지 못한 플로프를 종이컵에 담아가지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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