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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호텔에 다시 들어가 보니 엄마는 여전히 침대에서 누워계셨다. 하루종일 혼자 있게 해 드렸으니 엄마가 조금이라도 호전되었기를 기대했지만, 엄마는 여전히 기력이 없고 기침을 온몸을 흔들어가며 하셨다. 호텔방에는 유튜브가 연결되는 최신 TV가 있었는데, 남편이 외도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들이 자살했습니다 등에 대해 법륜스님이 해설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추천리스트에 떴다. 한글 자판을 입력하는 방법을 알려드렸더니 온통 법륜스님 유튜브만 잔뜩 보셨나 보다. 엄마는 너무 힘들 때마다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위로받고는 했는데, 법륜스님을 찾았다는 건 그만큼 기진맥진한 상태인 것이다.
엄마는 기력이 없어, 온종일 내가 전날 해놓은 밥과 고추장, 마늘장아찌로 식사를 하셨고, 조금 일어날 수 있겠다 싶은 늦은 오후에는 호텔 바로 옆 야채가게에 가서 보라색 자두와 토마토를 한껏 사셨다. 내일 바로 타슈켄트행 기차가 예매되어 있는데, 저리 아픈 엄마를 모시고 어떻게 기차를 탈지 까마득했다. 기침할 때마다 허리가 아프고, 기력이 없다고 하셨다. 힘드신지 한숨까지 푹푹 쉬셨다.
다음날 기차 타기 전, 남은 오전에 나는 엄마가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마사지를 알아보았다. 사마르칸트에는 현대식 스파와 마사지도 많이 보였으나, 좀 더 전통방식의 마사지를 받으실 수 있는 터키식 사우나인 하맘 도부디(Hammam Dovudi)에 가보기로 했다. 다음날 호텔에 체크아웃을 한 후, 짐을 모두 다 꾸리고, 유아차까지 실고 택시를 불러 우리는 하맘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그곳은 어제 강제기부당한 유교회당 바로 그 근처였다. 하얀 대문을 지나자 마치 정수장같이 콘크리트로 만든 돔들이 마당에 주르륵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목욕탕이란 말인가 하며 돔 안을 들여다보아도 그 원리를 깨우칠 수 없었다.
긴 복도를 통해 건물에 들어가니, 긴 의자에 드러누워, 작은 아날로그 텔레비전으로 현지 방송을 보고 있던 주인아주머니가 걸어 나와, 우리의 배낭을 휑한 창고방에 둘 수 있도록 해주었다. 주인장 할머니 옆에는 초등학교 1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손녀딸이 과자를 먹으며 하릴없이 할머니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주원이는 하맘에 도착하자마자 쉬가 마려워 화장실을 찾았는데, 할머니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구조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폐허 공터였다. 잡초가 잔뜩 나 있는 공터 위에는 생수통부터 사람옷까지 쓰레기들이 그야말로 투척되어 있었고, 그 구석에 용변을 볼 수 있도록 철로 간이벽을 세워놓았다. 공터를 보고 주원이는 화장실이 어디예요 하며 곤란해했고, 나는 속으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위대한 엄마다라고 주문을 걸며 주원이가 간이벽에서 쉬야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쓰레기통도 따로 없고, 화장실도 따로 없고, 다른 손님도 없고, 주인장과 손녀만 넓은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데 이 곳에 말도 못 하는 엄마를 두고 가도 될까, 물이 없어 보이는데 이곳은 진정 목욕탕이 맞나 싶었지만, 엄마는 이미 주인장과 손녀의 소파 옆 소파에 드러누웠다. 엄마에게 돈을 드리고 우리는 2시간 후에 오기로 하고 자리를 피했다.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 사람이죠?"
나는 어제 지나다녔던 비비하눔 모스크 앞 타슈켄트거리를 유아차를 끌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어차피 2시간 정도만 때우면 되니, 기념품샵에나 들어가 주원이 구경시켜주고, 카페에 가서 주원이 주스나 먹이면 금방일 듯했다. 어느 기념품샵에서 냉장고 자석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 사람이죠?"
뒤를 돌아보니 페인트칠을 하던 젊은 현지남자였다. 여기서 페인트공으로 일을 하는 듯, 그의 파란 카라티와 검은 바지는 온통 페인트가 튄 흔적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가 말을 걸었을 때 나는 솔직히 귀찮은 마음이 들었다. 주원이와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어디서 왔냐, 왜 왔냐, 나도 한국 가봤다, 한국음식 좋아한다, 이름이 뭐냐 등 수많은 질문들을 반복해서 답해줘야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원이도 있는데, 그렇게 긴 대화를 하자면 주원이가 너무 지루해할 것이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네. 맞아요."라고 목례만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이 사람, 절대 우리를 놔주지 않는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하고 청년은 건물뒤로 사라지더니 잠시후 자신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왔다.
"평택알아요? 나 평택에서 일했어요. 한국 여자 예뻐요. 한국 음식 맛있어요."라며 그가 한국에 있었을 때의 사진들을 미친 듯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 사진 속에는 평택 국제거리로 보이는 곳에서 찍은 사진, 한국의 젊은 여자들과 우연히 같이 찍은 사진, 독사진 등 그의 한국생활이 찍혀있었다. 아마 생산직 비자였던 듯하다.
"나 한국 좋아해요. 한국 돈 많이 줘. 한국 다시 가고 싶어요. 지금 비자 없어요."
유아차에 앉아있는 주원이는 심심했는지 그 청년의 검정 바지에 페인트 묻은 부분을 손으로 눌러보기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중요한 부분에도 페인트가 묻어있었던 모양이다. 청년은 나에게 사진을 잔뜩 보여주다가 움찔하더니 주원이를 가리키며 "안돼."라고 했다. "죄송해요. 에고.. 그럼 반가웠어요." 나는 지루해하는 주원이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는데, 청년이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텔레그램 있어요? 친구 해요. 전화번호 있어요?" 나는 전화번호도 주고 싶지 않아 "한국 전화번호 밖에 없어서 안 될 거예요."라고 했지만, "한국 전화번호도 가능해요."라고 그 청년이 응수했다.
피곤이 몰려왔고, 나는 그 청년의 핸드폰에 내 번호를 찍어주는 것으로 빨리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밥 같이 먹어요. 맛있는 거 있어요."라고 청년이 가는 나를 붙잡았고, 나는 "저 오늘 타슈켄트에 기차타러 가요."라고 말했지만, 그 정도의 긴 문장을 이 청년이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기차가 뭐에요?"가 그 답변이었다. 나는 무응답 및 미소, 이어진 목례로 응수하며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타슈켄트 거리에 계속 있었다가는 이 청년과 다시 마주칠 것 같아, 나는 비비하눔 옆 카페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페인트칠을 하던 청년에게 탈출해서 한 5분 걸었을까. 또다른 음성이 뒤에서 들렸다.
"한국에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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