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뭐 먹으러 갈래?"
브로드웨이 거리를 나와 차를 타자 아이비에커가 말했다.
"주만지 어때?"
나는 이미 채식인들의 채식가능한 식당을 모아놓은 홈페이지 해피카우에서 찾아놓은 식당을 구글맵으로 보여주며 활짝 웃었다. 리뷰에 의하면 주만지(Jumanji) 레스토랑은 영어 메뉴도 제공하며, 채식메뉴도 메뉴판에 따로 명기되어 있다고 했다. 채식이 지원되는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편한 분위기 속에 얘기도 하며, 내가 밥을 사고 싶었다.
아이비에커는 주만지를 잠깐 찾아보고는 말했다.
"여기는 퓨전 레스토랑인 것 같은데, 우즈베키스탄에 왔으면 현지 음식을 먹어야지."
그는 일순간 나의 요구를 깡그리 무시했다.
아이비에커가 데려간 그 식당은 딱 봐도 현지인 맛집이었다. 거대한 식당 앞에는 이미 차가 여러 대 주차되어 있었다. 식사를 다 하고 나온 현지인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식사를 하기 위해서 현지인들도 끝없이 들어갔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자, 식당 안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몇십 개는 되어 보이는 테이블이 꽉 차 있었고, 현지인들은 모임보다는 식사를 하기 위해 앉아 있는 듯 먹기에 바빴다. 언어도 안 통하는데, 좀 조용해야 천천히 메뉴를 보면서 내가 먹을 수 있는 채식 먹거리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이런 시장 한복판 같은 분위기라면 메뉴도 제대로 못 보고 빵 쪼가리나 뜯고 오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식당은 오고 가는 사람들로 아예 식당 문을 모두 열어젖히고 있었는데, 인파 때문인지, 열어 놓은 문 때문인지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다행히 입구 들어가자마자 샐러드를 파는 코너가 있었는데, 샐러드에도 고기가 들어있지 않나 나는 자세히 보고 싶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들어가자"
샐러드를 뚫어지게 보고 있자, 아이비에커는 자리를 찾자며 독촉했다. 15년 전 아이비에커는 화가 나면 불같은 기질이 조금 있었는데, 아저씨가 된 이후로 더 무뚝뚝하고 급해졌다.
이 곳은 정말 현지인 맛집이었다. 비어있는 테이블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사람들이 먹고 일어선 테이블이 있어서, 아이비에커는 그쪽으로 오라고 했다. 종업원들은 쉴 새 없이 식당을 오가며 서빙하고 있었는데, 아이비에커는 종업원이 오자 테이블을 치워달라고 했다.
종업원이 가져다준 메뉴를 보니 딱 봐도 내가 먹을 건 없었다.
"뭐 먹을래?"
"나는 샐러드에 빵 먹을게. 주원이랑 엄마는 많이 못 먹어. 볶음밥 하나면 족할것 같아."
나는 딱 봐도 오이랑 토마토 밖에 안 들어가 있는 샐러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볶음밥은 저녁에 우리집에서 나올 거야. 내가 다른 거 시켜줄게."
아이비에커는 또 한 번 깡그리 나의 의견을 무시했다. 식당에 가면 채식주의자인 나를 배려한 남편과 가족들이 매번 내가 메뉴 결정을 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고, 나의 의견을 반영해주는 편인데, 내 의견이 수차례 무시당하는 상황이 낯설었다.
"너도 오늘 샤슬릭 먹어. 여기 샤슬릭 맛집이란 말이야. 네가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비밀로 지켜줄게."
아이비에커는 채식하지 않았을 때의 나를 기억하기에, 내가 채식주의자임을 밝혔음에도 고기를 권했다.
"아냐. 나는 고기 안 먹은 지 오래되어서 습관이 되어버렸어."
나는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잠시 후, 아이비에커는 종업원을 불러서 이것저것 시켰다.

그 결과, 내가 결정한 기본 샐러드 1개, 고기가 섞인 샐러드 1개, 치즈가 섞인 샐러드 1개, 커다란 빵 2개, 그리고 고기와 국수를 분리할 수 없는 국수(Norin 노른), 그리고 체리 주스가 나왔다. 샐러드는 내 앞에 놓였지만, 나머지 샐러드는 고기가 섞여있어서 먹을 수 없었다. 엄마와 주원이 앞에 놓은 고기국수도 양이 너무 많았다. 자칭 채식주의를 표방하는 엄마는 고기가 국수와 분리될 수 없이 섞여있는 국수를 받아보고는, 표현을 못했지만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비에커는 잔에 체리 주스를 따라주며 말했다.
"우리는 여름에 밥 먹을 때 체리주스랑 함께 해. 이 체리 주스는 이 식당에서 직접 만드는 거야."
더위로 지친 주원이는 얼굴이 잔뜩 벌게진 채로 체리주스만 연거푸 마셨다. 체리 주스는 많이 차갑진 않았고, 달짝지근한 게 설탕을 탄 것 같았다.
엄마는 자신 앞에 놓여진 어마어마한 국수를 포크로 조금씩 집어 먹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먹지 않았을 고기 국수이지만, 시켜준 호의는 무시할 수 없고, 그렇다고 채식주의자인 딸이 먹어줄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 것 같았다. 나는 분명 계란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빵을 뜯어서 샐러드와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계란이 들어간 빵은 절대 먹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계란이 함유된 빵을 먹지 않으면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 것 같았다. 평소 식사를 할 때 설탕이 들어간 음료를 절대 먹지 않은 나로서는 아이비에커가 한 잔 가득 따라준 체리 주스도 부담스러웠다. 체리 주스를 잔에 다 따르고는 병이 비워지자 아이비에커는 종업원을 불러 체리 주스를 또 시켰다. 나는 놀라서 말했다.
"아니야. 체리주스 이걸로 충분해."
"에이, 실컷 마셔."
아이비에커는 그저 우리가 먹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비에커, 너는 뭐 시켰어?"
"내꺼는 곧 있으면 나올 거야."
잠시후 종업원은 아이비에커 앞으로 커다란 샤슬릭 꼬치 2개를 가져다주었다.
"너희 엄마도 채식하시는 건 아니잖아. 엄마도 샤슬릭 조금 맛보시라고 해."
고기덩어리를 먹은 지 오래된 엄마는 손을 휘휘 저으며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예의상 거절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이비에커는 자신의 샤슬릭에서 고기 몇 점을 빼서 엄마 접시에 놓았다. 엄마는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정말 정신없는 식사였다. 식당이 시끄러워서 아이비에커랑 이야기도 아예 못했다. 고기로 가득한 샐러드와 고기 국수는 엄마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많이 남았다. 빵도 남아, 엄마는 비닐봉지에 빵을 담았다. 아이비에커한테 미안했는지, 엄마는 자신의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어 잔뜩 남은 체리주스를 담았다. 음식점에 가면 음식물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먹을 수 있는 양만 조금 시키고, 다 먹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엄마와 나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식사였다.
내가 내고 싶었지만, 아이비에커는 따라오는 나를 저지하며 자기가 냈다. 나는 누구한테 신세 지고는 못하는 성격이다. 내가 내지 못해서 나는 또 마음이 곤란했다.
식사가 끝나자 아이비에커는 숙소에 우리를 바래다주고, 저녁에 우리를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하고 떠났다.
'중앙아시아로 5살짜리 아이와 친정엄마와 3달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즈베키스탄 친구의 대궐같은 집 방문 (0) | 2022.11.04 |
---|---|
우즈베키스탄 초대에 응하는 선물 / 우즈베키스탄 최고급 케이크 사러 가기 (0) | 2022.11.03 |
타슈켄트 브로드웨이 거리 (0) | 2022.11.01 |
타슈켄트 매직시티파크에서 (0) | 2022.10.31 |
타슈켄트 티무르 박물관에서 3개 국어 속에 허우적대기 (0) | 2022.10.29 |
- Total
- Today
- Yesterday
- 국제연애
- 물품모니터링
- 아이와함께여행
- 곡식가루
- 유아차수리
- 우르겐치
- 타슈켄트
- 부하라
- 한살림남서울
- 사마르칸트
- 전남친
- 타슈켄트기차박물관
- 우즈베키스탄여행
- 한며들다
- 재회
- 타슈켄트한의원
- 해외여행
- 키르기즈스탄
- 비쉬케크
- 통역
- 아이와여행
- 카라콜
- 첫사랑
- 키르기스스탄
- 사마르칸트유대교회당
- 우즈베키스탄
- 중앙아시아
- 히바
- 초르수시장
- 밥상살림농업살림생명살림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