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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차를 아이비에커 차 트렁크에 실고는 주원이와 나란히 차 뒷좌석에 탑승했다. 아이비에커는 화가 덜 풀렸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는 운전할 때 쓰는 안경을 썼다. 나는 방금 전 당한 일들에 어안이 벙벙해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가리고 심호흡을 했다.
"어디 갈래?" 아이비에커가 물었다.
나는 정신줄을 다 잡았다. 오해는 풀고, 웃으며 헤어지고 싶었다.
"어디 조용한데 밥 먹으러 갈까"
아이비에커는 잠시 어디 갈지 생각하더니 시동을 걸었다. 나는 아이비에커와 눈도 마주치기 싫어서 운전석 뒤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비에커는 룸미러로 내가 그렇게 있는 모습을 보더니, 말을 하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예를 들어볼께(打个比方). 내가 한국에 갔어. 한국어도 몰라. 처음 가는 장소에서 돈이 다 떨어졌어. 내가 너한테 전화해서 사정을 얘기하면 너, 내가 부담스러울 것 같아? 아니잖아. 선뜻 도와줄 거잖아. 네가 여기서 그렇게 고생하면 내가 마음이 어떨 것 같아. 응?"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심호흡과 한숨 사이를 오가며 숨만 쉴 뿐이었다. 나는 이미 너덜너덜해져서 모든 에너지가 방전된 상태였다. 아이비에커는 내가 말이 없자, 내가 수긍한 걸로 생각했는지 잠잠해졌다.
아이비에커가 데려간 식당은 조용함과 거리가 아주 먼 타슈켄트 어느 쇼핑몰의 푸드 코트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쇼핑몰을 빙빙 도는 빨간 전기기차가 지나갔다.
"얘 타게 할래?(他要上吗?)“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 딸은 저거 태워주면 엄청 좋아하던데."
저런 거 한국에도 세고 셌거든. 그리고 지금 너 그렇게 나한테 무례하게 굴어놓고, 이 기분에 저걸 애를 태우겠니? 불같이 화내던 아이비에커는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는지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쇼핑몰은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주문하는 소리,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 음식 만드는 소리, 음식이 다 되어서 번호표가 울리는 소리, 기차가 다니면서 빵빵 거리는 소리... 소음으로 가득 찬 푸드코드는 인산인해였다. 앉을 곳도 없어서 누군가 햄버거를 먹고 일어선 그 자리를 치우고 앉았다. 이런 곳에서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할까. 그것도 이렇게 화가 난 상태에서.
아이비에커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얼굴이 굳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 먹을래?"
햄버거나 피자를 파는 푸드코트에서 내가 먹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줄 알았지만, 다행히 중국 국수를 파는 곳이 있었다. 아이비에커가 채식하는 나를 위해 두부와 야채만 넣고 볶음면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이거 나랑 주원이 같이 먹으면 돼."
아이비에커가 말했다.
"이건 너나 먹고, 얘는 맛있는 거 먹어야지. 햄버거 어때?"
"아니야. 주원이도 두부 좋아해."
"너는 왜 얘한테 묻지도 않니? 여기서 유명한 건 햄버거야. 콜라도 먹을 거지?"
"아니. 그냥 물 마시면 돼."
"그냥 마셔. 주스라도 시켜올게. 잠깐 앉아있어."
내 모든 발언이 내숭으로 들리는 걸까. 아니면 채식주의자인 내가 시키는 모든 음식이 맛이 없다고 간주하는 걸까. 내 발언을 깡그리 무시한 아이비에커는, 햄버거와 콜라 정도 먹어줘야 맛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비에커는 저 멀리 있는 햄버거 가게로 주문하러 갔다. 이곳은 현지 물가 대비 정말 비쌌다. 햄버거도 오천 원, 내가 시킨 중국면도 4000원 정도 했다. 현지인들의 월급이 미화 300달러 ~ 500달러 수준이니, 월급 100분의 1 가격이 1인분 음식값이었다. 주원이는 스케이트를 탄 데다, 소시지빵도 먹어 배도 어느 정도 찬 상태라 졸려했다. 푸드코트는 너무 시끄러웠다. 감정이 통제가 잘 안 되고 있었던 나는 푸드코드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는 양손으로 머리를 집고 눈을 감았다. 나도 모르게 읊조렸다. 망했다. 망했다. 폭망 했다. 내 여행은 망했다....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야 제맛이라지만, 계획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났다. 중앙아시아에 막 도착한 그 첫날 내가 꿈꿨던 여행은 이식쿨호수 근처에 단독주택을 빌리고, 설산을 바라보며 호수변에서 맨발 걷기 하고, 평화로운 잔디밭 위 나무식탁에서 현지 채소로 만든 볶음 요리와 밥을 먹고, 중앙아시아에서 유명한 과일들을 먹는 것이었다. 오후에는 주원이를 재우고, 하얀 노트북을 켜고 앉아, 나의 이식쿨 생활을 글로 써봐야지.
그런데 현재 나는 지가 나한테 뭣도 아니면서, 잘못한 게 씨알만큼도 없는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낸 남자의 차를 타고, 사람들로 가득 찬 시끄러운 푸드 코드의 더러운 플라스틱 식탁에 앉아, 한국에서도 절대 먹지 않을 패스트푸드를 기다리고 있다니.
"엄마, 아이비에커 삼촌 어디 간 거야?"
주원이가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나를 환기시켰다.
"어, 주원이 먹을 거 시키려 가셨대."
잠시 후, 감자튀김과 햄버거, 콜라, 주스를 플라스틱 트레이에 담아 온 아이비에커가 식탁에 앉았다. 한국에서도 절대 아이에게 먹이지 않던 햄버거. 나는 오늘 내 새끼를, 내 자신을 계속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거나 먹어라. 주원아. 주원이는 햄버거를 살짝 깨작거리더니, 감자튀김을 휴지로 집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거 너 통역해 줘. 주원아. 감자튀김은 손으로 먹는 거야. 이봐. 아저씨처럼."
주원이가 말했다.
"손에 감자튀김 묻는 거 싫어요."
"남자는 감자튀김도 손으로 먹을 수 있어야 해. 아저씨처럼 이렇게."
감자튀김 먹다가 여기서 남자가 또 왜 나오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비에커에게 된통 당한 여파로, 위장이 다 얼어붙었는지, 도저히 따뜻하게 볶아 나온 중국 볶음면이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비에커는 배가 고팠는지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다 먹었고, 우리는 우리가 시킨걸 다 싸서 아이비에커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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