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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벅적하던 쇼핑몰 푸드코드를 벗어날 때, 나는 이것이 아이비에커와의 15년 만의 재회, 그 마지막임을 믿을 수 없었다. 처참하고, 너덜너덜하고, 또 쇼핑몰 푸드코드 때문에 주위도 산만했다. 내 손에는 아까 내가 먹지 못한 음식들이 비닐봉지에 잔뜩 포장되어 있었다. 다시 주차장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데, 사람이 워낙 많아서 셋이 나란히 걸을 수 없어, 아이비에커가 살짝 앞서갔다. 그러다 문득 나는 주원이의 모자를 푸드코트 식탁 위에 놔두고 온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주원이의 손을 잡고 다시 우리가 앉아있었던 푸드코드 식탁으로 돌아가 모자를 황급히 집어 들었다. 그는 내가 푸드코트 식탁에 다시 갔다 오고 있는 걸 모르는지 여전히 앞만 보고 가고 있었다. 주원이와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데, 저 멀리 걷고 있는 아이비에커의 등짝이 보였다. 그 등짝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내가 뒤에서 오고 있는지 신경도 안 쓰는 사람. 순간이었지만, 그의 무관심은 너무 차가웠고, 내 존재가 함부로 대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내 발로 우즈베키스탄까지 와서 도대체 이게 뭔 꼴이냐. 엘리베이터에 가까이 갔을 때 비로소 아이비에커는 우리가 없는 걸 알고는 뒤돌아 봤다.
"무슨 일이야?(怎么了?)"
"애 모자를 놓고와서. 이제 괜찮아."
나한테 관심도 없고, 함부로 대할 거면서, 내 안위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도대체 오늘 얘는 왜 아이스링크에 오고, 점심을 사주고, 차를 태워줄까. 얘는 자신의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잘해줬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일말의 설득하려는 마음이 아직 남아있었다.
"아이비에커, 내가 사는 서울은 워낙 차도 많고, 남편도 나도 운전을 못해서 차 없이 살아. 그래서 많이 걸어다녀. 운동도 되니, 나도 걷는 걸 좋아해. 그래서 그런 거야. 그리고 너도 회사 때문에 바쁘잖아. 이제 좀 나를 이해하려나?"
아이비에커는 말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더니 입을 떼었다.
"그래. 그건 서울이고, 여기는 우즈베키스탄이야. 도움 받아야 할때는 받는 게 맞아. 너처럼 그러는 건 무모해."
또다시 훈계 받자고, 나 자신을 설명한 건 아니었는데...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기 힘들었다. 나의 기분은 이성으로 통제하려고 해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근래, 아니, 근 몇 년 새에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빴던 적이 있었던가. 가장 기분 좋고 아름다워야 할 마지막날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아이비에커가 룸미러로 나를 보더니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갈껀데?"
"음.... 우리 차 한잔 할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에 웃으며 헤어지고 싶었다.
"나 지금 회사에 급한 일들이 있어서 다시 들어가 봐야 돼. 전화도 오고. 일단 숙소에 가있어. 일 끝나고 갈게."
이럴꺼면 왜 물어봤나. 도대체 왜 바쁜 와중에 굳이 나를 찾아왔나. 일이나 할 것이지... 그나저나 타슈켄트에 온 지 5일이 벌써 흘렀고, 다시 오면 바허가 연락 꼭 하라고 했는데, 바허는 내가 여기 온 걸 알고 있나? 마지막날인데 연락도 안 하고 이렇게 떠나면 바허가 섭섭해하지 않을까?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문득 폭군같은 아이비에커와 와이프 사이는 어떤지 궁금했다.
"넌 와이프랑 가끔 싸우니?"
"아니, 전혀 안 싸워. 와이프는 말 잘 듣지(她很听话)。 나보다 7살 어리잖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그래... 너한테는 그런 사람이 딱이야.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입을 닫았다.
드라마 속에서 어른들이 자녀가 데리고온 이성친구와의 결혼을 반대할 때 하는 대사가 있지 않나. 딱 보면 모르겠니. 너는 꼭 끝까지 가봐야 후회하고 정신 차릴래. 아이비에커의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순간, 나는 보지 않아도 될 그 끝을 굳이 본 것 같았다.
숙소에 도착해 아이비에커가 트렁크에서 유아차를 내렸다. 유아차 짐칸에 포장되어 있던 선물을 꺼냈다.나는 나의 모든 신경을 동원해서 굳어있던 얼굴을 풀고, 입꼬리를 살짝이라도 올리려고 애쓰며 말했다.
"아이비에커, 이거 니 선물. 그동안 신경써줘서 고마워."
"뭐 그렇게 예의차리고 그래.(你这么客气干嘛)"
"생각해보니까 내가 너한테 선물을 준 적이 한 번도 없더라고. 나는 매번 받기만 했잖아."
"이거 향수네."
아이비에커는 예전부터 감기에 잘 걸렸다. 갓 서안에 유학을 시작해서 아이비에커와 한 반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한 반이었던 아이비에커가 어느 날 수업에 오지 않았는데, 바허가 아이비에커는 감기로 기숙사에서 드러누워있다고 했다. 인사 몇 번 나누어보지 못한 아이비에커였지만, 돌봐줄 사람도 없이 혼자 누워있다고 생각하니 같은 유학생으로써 측은했다. 나는 점심 먹고 돌아오는 길에, 매점에서 비타민C가 많은 과일인 귤을 한 봉지 사다 아이비에커 방에 걸어놓았다.
15년 만에 다시 아이비에커를 만났을 때, 아이비에커는 차를 운전하면서 에취 하며 재채기를 해댔다. 더운 밖에 있다가, 차가운 차로 돌아왔을 때, 혹은 반대의 상황에 재채기를 했다.
"감기걸렸어?"
"아냐. 알레르기성이야. 약 먹으면 돼."
그는 차가 정지하는 틈을 타, 한 손으로 하얀 알약을 꺼내 생수와 같이 먹었다.
"예전에도 너 재채기했었어. 감기 자주 걸렸었잖아."
"그랬던가."
저 알약 가지고는 재채기를 평생 달고 살아야 할 듯한데... 나는 내가 효과가 있다고 믿는 아로마오일을 사주고 싶었으나, 타슈켄트에는 순수 아로마 오일을 파는 곳이 너무 멀리 있었고, 슈퍼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아이비에커의 재채기가 나아지고 건강하길 바라며, 저자극성 향수를 선물로 구입했다. 그걸 사느라고, 돈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고, 그래서 힐튼호텔에 걸어갔고, 그래서 아이비에커가 내가 걸은 것에 대해 화를 냈고, 면박당한 나도 화가 났다... 웃기는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잘가."
"너 또 안 나올꺼야?(你又不出来吗?)“
"아냐. 저녁에 보자. 나갈게."
나는 아이비에커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비에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탔다. 나는 그 모습을 기력 없이 바라보았다. 잘 가.. 그때 아이비에커가 빵! 빵! 하고 클락션을 2번 조용히 눌렀다. 그만의 인사였다.
네덜란드에서 온 아저씨는 오늘이 중앙아시아에서 온전한 하루를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얼마나 그을렸는지, 전신의 피부가 벌겠다. 아저씨는 무려 2달 간 네덜란드에서 같이 온 아저씨 2명과 이 더운 여름에 타지키스탄의 파미르고원, 우즈베키스탄 횡단을 자전거로 해냈다고 한다. 긴 여행 끝에 아저씨들은 내일 네덜란드로 돌아간다고 했다. 숙소의 한편에 그동안 고생했던 자전거들이 모두 단단하게 박스포장 되어 있었다. 여행을 마무리하는 아저씨들에게 오늘은 그저 휴식만을 위한 날이다. 45도까지 치솟는 중앙아시아의 여름 한가운데, 자전거로 횡단한 아저씨들을 보니, 유아차 끌고 중앙아시아에 온 나는 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중앙아시아 현지인들이 사서 하지 않을 고생을, 외국인들이 자진해서 돈 내고 한다니 아이러니했다. 네덜란드 아저씨들은 자전거에 텐트, 식기, 휴대용 정수기 등을 모두 달고 다녔기 때문에, 파미르 고원이든 사막이든 어디에서라도 물만 있다면 야영을 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아저씨는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마당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주원이와 나를 위해, 그동안 찍어온 사진을 보여줬다. 당시 나는 타지키스탄에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사진을 보고는 바로 결정할 수 있었다. 파미르고원에 갈 절호의 기회일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유아차 끌고 갈 곳은 아니라는 것을.
아저씨의 사진을 다 보고 난 나는 드디어 아저씨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주요사건 위주로 털어놓을 수 있었다. 지난 2주간 아이비에커로 인해 안 해도 될 10년 치의 마음고생을 20일에 모아서 한 느낌이었다. 아저씨는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시크함이 있었는데, 아저씨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때로는 미간을 찌푸리고 턱에 손을 괴다가, 때로는 고개를 저으며 듣기도 했다. 아저씨는 네덜란드인 특유의 직화법으로 나의 모든 질문에 즉시 답해주었다.
"아니, 둘 다 결혼했는데, 둘이 만나자니 그게 말이 되요?" "그건 걔가 이상한 거지."
"아니, 이런 상황에서 걔가 저한테 화를 내는게 말이 돼요?" "걔가 너무했네. 무례한 거야. 다시 만나지 마."
"오늘도 저녁에 저를 만나러 온다는데, 어쩌죠." "너무 위험해. 전화해서 못 만난다고 해."
아저씨와 대화를 한참 나누고 있는데, 엄마가 양손 가득 과일과 채소를 들고 들어왔다. 초르수 시장에서 산 모양이었다. 하.. 내일 우리는 키르기스스탄 간다고요. 도대체 저 많은 채소와 과일들을 오늘 사면 어쩌란 말입니까. 대책 없이 이것저것 많이 사온 엄마를 따라 주원이는 시원한 방으로 들어가고, 아저씨와 나는 다시 평상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이럴 때면 엄마는 영어를 모르고, 나는 영어로 고민상담을 할 수 있다는 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아저씨는 본국에서 교장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여름방학이라 놀러온 것이라고 하는데, 나의 고민을 들어주는 게 어찌 학생상담하는 느낌이 들긴 했다. 아저씨는 나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면서,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불쾌하면 불쾌하다고 하라고 했다. 아저씨는 오늘 저녁에 다시 그 녀석 만나면 안 돼. 나는 정말 반대야!라고 신신당부하며 아저씨들과 아이스커피 마시러 2층 도미토리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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