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를 입고 화장을 다 한 얼굴로 침대에 가로누워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9시였다. 이미 BB크림은 내 얼굴에 흡수되어 옅어진 지 오래였다. 무슨 힐튼호텔 루프탑인가. 바허며 아이비에커며 나타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 오지 마. 나도 상관없어. 나는 진작에 너희 보러 우즈베키스탄 온 게 아니라고. 나는 처참함을 누르고, 예의와 배려심을 갖추어 문자를 보냈다.
"아이비에커, 오늘 너무 늦었다. 무척 바쁜 것 같은데 무리하지마. 다음에 또 보면 되지. 그동안 고마웠어."
눈을 질끔 감았다. 띵동. 그렇게 연락이 없던 아이비에커에게 바로 답장이 왔다.
"곧 갈꺼야."
흠... 정말 바빴던 것일까.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너무 늦어서 어디 가지는 못하겠다. 우리 묵는 호스텔 마당에 사람들이 앉을만한 탁자가 있거든. 거기 앉아서 잠깐 보면 되겠다. 바쁜 것 같은데 천천히 오고. 그리고 무리하지 마, 오지 못 해도 다 이해해."
아... 나의 출중한 연기실력, 나는 쿨한 척의 달인이었다. 마지막이니 처참했던 오늘은 다 잊고, 웃으며 보내주자. 아이비에커가 온다고 하지 않았다면, 화장도 다 지우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준비도 다 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에게 일절 간섭 없이 주원이에게 핸드폰으로 만화를 보여주던 엄마는 이미 육감으로 나의 모든 감정과 상황을 파악했다. "얘. 지금 몇 시니? 걔네 오지말라그래." 첫날, 내가 올린 인스타그램 사진을 본 것만으로도, 일하다 말고 바로 나를 픽업하러 온 아이비에커는 나의 자존감을 하늘 위로 둥둥 뜨게 했고, 오늘밤 절대 나타나지 않는 아이비에커는 내 자존감을 땅끝까지 떨어뜨렸다. 엄마의 한마디가 이 모든 일들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줬다.
띵동. 아이비에커의 문자가 도착했다.
"니네 호텔 앞."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재수 없었다. "얘 왔대. 잠깐 갔다 올게." 나는 재수 없다고 속으로 말하면서도 헐레벌떡 방을 나갔다. 그가 뚜벅뚜벅 숙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정말 바빴던 모양인지, 그는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13년 간 IT회사를 다니던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프로젝트 때문에 하늘이 껌껌해져야 빌딩을 나오던 날, 지하철마저 끊겨서 택시를 타던 날, 지주회사 고객의 횡포에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나오던 날...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아닌 걸 진작에 알았음에도, 내가 대기업에 다닌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가족들의 얼굴이 스치던 나날들... 그 나날들에 내가 흔히 짓던 그 지친 얼굴이었다. 직장 그만둔 지 1달도 안 되었는데, 나는 아이비에커가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아이비에커는 핸드폰을 2개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개인의 핸드폰이고, 하나는 직장에서 새벽에도 전화할 수 있어서 수시로 몸에 상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타슈켄트에 다시 돌아온 날, 점심시간이었음에도 수시로 직장과 통화했다. 지친 아이비에커 앞에서 자존감이니 뭐니의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미안함만이 내 뇌리를 스쳤다.
아이비에커가 숙소로 걸어들어오자, 주인아저씨가 나와 아이비에커와 악수를 하고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주인아저씨한테는 미리 친구가 여기 방문할 예정이라고 말해놓은 상태였다. 낮에 나에게 아이비에커를 다시 만나지 말라고 충고한 네덜란드 아저씨 3명의 방은 이미 소등되어 있었다. 깨어있었다면 아마 2층에서 쯧쯧쯧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하고 나에게 눈빛으로 레이저를 쐈을 것이다.
"나쁘지 않네(不错)"
숙소를 둘러보던 아이비에커가 말했다.
"아주 전통적인 우즈베키스탄 주택 스타일이야. 부엌이랑 창고, 화장실이 숙소와 분리되어 있고, 중간에 너른 마당도 있고... 저기 평상들이 너희 아침 먹는 곳이지? 무화과 나무도 있고. 너희 방은 어디야?"
"보고 싶어? 우리 방은 저기야. 엄청 작아."
나는 내가 묵고 있는 방의 문을 조금 열었다. 좁은 방에는 3개의 침대로 공간이 가득차 있었는데, 그중 한 침대에 엄마와 주원이가 이불을 얼굴까지 덮고 침대에 대놓고 숨어있었다. 내가 아이비에커가 도착했다고 말하자 엄마가 말했다.
"너나 만나. 나 부르지 말고. 난 만나기 싫어."
어쩌면 엄마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나의 모든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엄마 주무시네. 우리 저기 마당에 앉자."
나는 황급히 방문을 닫았다.
좁디 좁은 우리 숙소를 보고 아이비에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도 많이 번다던 한국에서, 15년 만에 만난 한국친구, 대기업에 다니고, 그 유명한 강남스타일 노래에 나오는 강남에 사는 한국친구가 물가가 싸다는 중앙아시아에 와서 묵는 숙소가 저렇게 좁다니. 대궐같이 넓은 집에 사는 아이비에커는 배낭여행문화가 아예 없는 우즈베키스탄 사람이었다. 어쩌면, 한국에 살아도 뭐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네 그렇게 생각했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