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에커는 오늘 하루 종일 바빴다고 한다. 일이 아직 안 끝나서, 밤 10시가 가까워오는데, 나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직장에 복귀해야 한다고 했다. 남일 같지 않았다. 회사에서 배정된 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나도 거의 매일 새벽퇴근하던 때가 있었다. 잦은 해외출장과 고객응대 등으로 스트레스가 누적되자, 영국-체코 출장 갔던 어떤 날에는 목소리까지 나오지 않아, 쉰 목소리로 미팅을 했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 아이비에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직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고.
"아이비에커. 정말 쉬엄쉬엄 일해. 나도 오늘의 너처럼 정말 힘들게 일했거든. 노트북 들고 집에 가서도 일하고, 또 해외출장 때는 4시간 밖에 못 잘 때도 있었고, 스트레스로 1시간마다 잠에서 깰 때도 있었어. 쫄딱 굶고 일했던 어느 날, 영국 회식자리에서 흑맥주 하나 마셨다가 잠깐 졸도한 적도 있어. 아이비에커. 스트레스받지 말고 즐겁고 편하게 일해야 해."
"너무 힘들게 살았다. 우리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여자들이 아주 편안하게 살아. 집에서 하루종일 있으면 되고, 또 일하고 싶어도 재미로 가볍게 일하는 수준이면, 시댁이랑 남편이 허락해주지. 너도 좀 쉬운 일을 찾아봐. 여기 타슈켄트에서 한국어 교사하는 거 어때?"
분명 나는 아이비에커 건강 걱정을 했는데, 타슈켄트 한국어 교사 제안까지 이야기가 튀다니... 그런 얘기를 하는 아이비에커가 마치 동화 속 현실을 모르는 피터팬 같았다.
"그래. 한국어 교사 좋네. 근데 나 러시아어도 못하는데 학생들이랑 어떻게 말해? (웃음)"
"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고급반을 담당하면 돼. 너 영어도 좀 하잖아. 영어로 강의하면 고급반 애들은 알아들어."
"그래. 알았어. (웃음) 고려해볼게."
혼자 나오라고 3일 전에는 화까지 냈으면서 정작 만나니 아이비에커는 이런저런 화제를 돌면서 우물쭈물거렸다. 밀폐된 장소가 아닌 공개된 장소여서? 바허가 올 예정이어서? 아이비에커가 나와 단둘이 만나하고 싶었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나저나 내가 3일 전에 보낸 이별의 이메일은 보긴 본 건가.
"너는 부모님하고 사는 건 어때? 행복하니?(跟你的父母一起生活怎么样?幸福吗?)"
점심때 나한테 화낼 때는 언제고, 지친 모습의 아이비에커에게 내가 물었다.
"부모님하고 사는 건 좋아. 일단 집에 가면 사람이 있다는 게 좋지. 내가 친구 만난다고 하고 나 기다리지 말라고 분명 말씀드려도, 우리 부모님은 새벽에 내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거실을 서성거리면서 걱정해 주셔. 와이프는 나도 안 기다리고 먼저 자는데 말이야. 늘 누군가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
"그렇구나."
오늘도 아이비에커 부모님은 아이비에커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누굴 만나는지, 어디를 갔다오는지, 아이비에커는 수시로 부모님께 보고 드리고, 부모님은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아이비에커의 안위를 체크하고... 지금 이 순간 아이비에커가 나를 만나기 위해, 아이비에커 부모님께 뭐라고 핑계를 둘러댔을까. 그래서 아이비에커는 자꾸 회사 업무시간 동안 점심시간을 빌어 나를 만나려고 했던 것이다.
아이비에커의 집에 초청 받던 날, 마지막 건배를 할 때 아이비에커 아버지가 말했다. "서북대학교 유학생들끼리의 우정이 지금처럼 아름답고 영원하길 바라요." 아이비에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데리고 온 외국인 친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내 아들이 얼마나 인간관계가 좋길래, 한국인이 그것도 2명씩이나 아이비에커를 보러 우즈베키스탄에 왔나 하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성제오빠는 바허나 아이비에커랑 하나도 안 친하고, 아이비에커는 나에게 흑심이 있고, 바허는 아이비에 커 때문에 나한테 연락도 안 하고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하시겠지. 굴나라 호스텔에 앉아 있는 아이비에커를 얼른 부모님 품으로 보내드리고 싶었다.
그 때 기도를 끝낸 바허가 돌아왔다. 돌아온 바허의 손에는 음료수 2병과, 물 1병 그리고 쿠루트가 들어있었다. 음주를 하지 않는 무슬림에게 음료수는 맥주요, 쿠르트는 쥐포였다. 바허와 아이비에커는 쿠루트 비닐포장을 벗기더니 쿠루트를 한 개씩 베어 물고는 우걱우걱 씹기 시작했다. 쿠루트는 뽀얗고 둥근 게 화이트초콜릿 같기도 하고, 팥죽에 넣어먹는 새알심 같기도 하다. 쿠루트는 발효된 우유에 수분을 빼고, 소금을 넣어 만든 유목민들의 겨울철 단백질 보충식이다. 이 쿠루트는 세계테마기행 중앙아시아 편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데, 패널로 나온 한국분이 쿠루트를 씹자마자 인상을 팍 찌푸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채식주의자인 나는 키르기스스탄에 있을 때부터 이 쿠루트를 시장만 가면 잔뜩 보았지만, 비위가 약한 엄마나 채식하는 나나 절대 먹지 않았다. 아이비에커는 내가 쿠루트를 모르는 줄 알고, 간단히 설명 후 쿠루트 한 알을 또 하나 먹고는 가루가 될 때까지 우걱우걱 씹는다. 친절하고 다정한 나의 바허가 쿠루트를 바라만 보는 나를 위해 손수 쿠루트를 하나 건넸다. 이 순간 절대 먹기 싫은 이 쿠루트를 이런저런 사유로 먹기 싫다고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하루 눈 딱 감고 먹는 게 좋을까. 10여 년 만에 만난 친구들이 자신들의 전통과자라면서 자신 있게 권하는데, 솔직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는 바허가 건네준 쿠루트를 받아 우걱우걱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쿠루트는 짜고, 시고, 푸석했다. 쿠루트가 가루가 되면서 나의 이에 달라붙었다. 나는 물병을 들어 이에 붙은 쿠루트 가루도 얼른 집어삼켰다.
"남은 건 너 다 싸가. 맛있지? 우리도 보통 간식으로 먹어. 그거 알아? 쿠루트는 수출도 해.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일하잖아. 그 사람들을 위해 쿠루트가 전세계로 팔려. 한국에도 아마 있을껄. 너도 가기 전에 잔뜩 싸가."
친절한 바허의 쿠루트 자부심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날 비닐포장에 남은 쿠루트를 나는 모두 싸왔다. 쿠루트를 자랑스러워하는 바허 앞에서 나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건 너무 싹수없을 것 같았다.
쿠루트를 다 먹은 바허는 내가 너무 허술하게 여행 다닌다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으로 키르기스스탄의 관광지를 찾아보지 않나, 지도로 경로를 찾지 않나. 손가락으로 지도를 확대해보기도 하고, 블로그나 사이트를 찾기도 하고, 키르기스스탄 여행정보를 찾는 바허는 몹시 열성적이고 부산했다. 바허야, 지금 밤 10시고, 네가 그렇게 찾을 필요 없어. 아마 러시아어 못하는 내가 너보다 키르기스스탄을 더 잘 알 걸.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다년간의 결혼생활로 상대방이 나를 위해 허튼짓을 할 때는 짐짓 모르는 척하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참을 찾던 바허가 나에게 말했다.
"이식쿨! 너는 이식쿨에 가야해."
정말 이 말에 나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한국에 온 친구에게 "남해! 너는 남해를 가야 해." 혹은 "동해! 너는 동해를 가야 해."라는 표현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이식쿨은 키르기스스탄의 호수인데, 바다만큼 크다. 세계에서 7번째로 깊고, 부피로는 세계에서 10위 하는 호수, 그 호수를 둘러싼 마을만 20개가 훨씬 넘었다. 키르기스스탄만 치면 나오는 게 이식쿨인데, 이식쿨에 가라니. 내가 대답도 안 하고 웃고만 있자 바허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은주, 뭘 그렇게 웃고만 있어.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진지하다고! 이식쿨에 가는게 제일 좋대."
"그래. 고마워. 꼭 이식쿨에 갈께."
"어, 스펠링은 이렇게 돼. 내가 텔레그램으로 보내줄까?"
"어... 아냐. 지금 내가 적을께. ISSYK-KUL"
나는 바허의 자존심을 위해, 바허가 러시아어도 모르는 바보 같은 나에게 핵심적인 조언을 하며 보람을 느끼길 바라며, 굳이 이식쿨 스펠링을 내 핸드폰에 받아 적었다. 바허는 그 후로 내가 키르기스스탄에서 이식쿨에 도달하기 전까지 텔레그램으로 내가 이식쿨에 갔는지를 체크했다. 나의 우즈베크 절친 바허의 애정에 감사해서, 나는 실제로 1달 후 이식쿨에 도착했을 때 인스타그램에 이식쿨 사진과 함께 바허에게 감사의 인사를 공개적으로 썼다.
'바허, 고마워. 너의 추천으로 인해 내가 이식쿨도 다 와보네.'
바허와 아이비에커는 유진을 생각하며 유진에게 영상메시지를 남겼다.
"유진, 돈만 열심히 벌지 말고, 우즈베키스탄에 놀러와. 여기 이 자리는 바로 너 거야."
그렇게 우리는 서북대에서 4명이 함께 다니던 추억을 소환했다.
11시가 다 되자, 아이비에커가 슬슬 일어나자고 했다. 정말 마지막이구나. 아이비에커, 바허.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겉도는 이야기만 하다 이제는 작별해야 했다. 바허가 두 팔을 벌려 나를 꼭 안아줬다. 마른 바허의 품은 따뜻했다. 무슬림들은 남자와 남자끼리는 악수에 이은 포옹을 하지만, 성별이 다르면, 가슴에 손을 얹는 방식으로 신체접촉 없이 인사를 한다. 바허도, 아이비에커도 자신의 집에 초대했을 때는 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 바허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타키토, 이렇게 안아보니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
따뜻한 목소리가 나를 휘감았다.
아이비에커가 옆에서 꿍시렁거렸다.
"겉모습은 진짜 하나도 안 변했는데, 뇌 속은 이상하게 많이 변했어. 다음에 올 때는 뇌를 좀 씻어가지고 와."
결혼한 아이비에커에게 결혼한 내가 의도적으로 거리감을 둔 게 아이비에커는 너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그게 사실 내가 아이비에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는데, 아직 모르는 건가.
"그래. 알았어. 한국가면 꼭 뇌를 씻어볼게."
바허가 팔을 놓자, 이번에는 아이비에커가 팔을 벌렸다. 아이비에커의 품도 그대로였다. 아이비에커가 한참을 말없이 나를 안고 있더니 말했다.
"어딜가든지 안전 조심. 건강하고... 행복하고..."
바허는 묵묵히 아이비에커와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갈게. 먼저 들어가."
"아냐, 너희 가는 거 볼게."
바허가 먼저 자신의 회색 쉐보레를 끌고 먼저 떠났다. 아이비에커도 검정 쉐보레에 시동을 걸어 유턴을 했다. 이제 가려던 아이비에커가 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고함을 질렀다.
"나 절대 잊지 마(千万别忘了我)“
나도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을 꺼냈다.
"야, 너 내가 보낸 편지나 읽어!"
내가 보낸 이메일은 아직 수신완료지만 읽지 않음으로 상태값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내가 상처를 준 것을 사과하고, 이번에 내가 거리를 둔 것은 이런 마음 때문이었다고 이해시키고, 과거에 좋은 추억 만들어주어서 너무 고맙다는 나의 진심을 꾸역꾸역 담았는데, 읽지 않음으로 남아있으니 매일매일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 아이비에커가 말했다.
"나 니 편지 읽었어. 3번이나 반복해서 그것도 소리내서"
그러더니 클락슨을 빵! 하고 그의 특유 인사를 하더니 휑하고 가버렸다.
그렇게 나는 바허와 아이비에커와 작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