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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콜 시내관광을 마치고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까지 가는 길에 푸시킨 공원을 들렀다. 푸시킨 공원은 "원하는건 모두 다있어. 다만 허름할 뿐이야."라는 인상을 주었다. 정말 공원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기능들이 다 있었다. 기본적으로 가족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들이 나무들이 제공하는 그늘 아래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다. 일부 벤치는 약간 망가진 채로 오래 방치되었을 뿐이다. 또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기구도 있었다. 다만, 우리가 기대한 대관람차는 완전 망가져서 작동을 안 하고 언제 수리될 예정인지 기약이 없을 뿐이다. 우리는 가보지는 않았지만 심지어 이곳에는 동물원도 있다고 했다. 또,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방치되어 있는 넓은 운동경기장 같은 것도 있었다. 공원 곳곳에 여러 조형물들이 소련느낌을 팍팍 풍기면서 공원 사이 사이 배치되어 있었다. 18키로가 넘어가는 주원이를 유아차에 태우고 걸어다녀야 하는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인도였는데, 인도(人道)가 평평해서 나를 반하게 했던 카라콜 시내와는 달리, 푸시킨 파크 내 시멘트 인도는 시 예산이 미처 투입이 되지 않았는지 전쟁 폭격을 맞은 듯 갈라져 있었고, 키르기즈스탄의 거칠고 생명력 넘치는 잡초들이 시멘트 사이사이를 메꾸고 있었다. 유아차를 끄는 나의 손목과 발목과 주위를 살피는 나의 눈은 금방 피로해졌다. 엄마는 그래도 키르기즈스탄의 공원은 나무 그늘이 많고, 벤치가 많아서 좋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셨다. 비쉬케크를 다녀와서인지 엄마의 평가잣대는 많이 낮아져있는듯 했다. 

푸시킨 파크 놀이공원. 부서질 것 같은 철골 놀이기구가 잘 작동해서 놀라웠다

 성제오빠와 저녁식사는 같이 하기로 해서, 숙소에 들어가 미역국과 밥을 새로 했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잔뜩 차렸는데, 그제야 자신의 방에서 스터디를 하던 성제오빠가 멀찍이 나왔다.

 "아이고, 밥을 새로 했구나. 나는 주인집에서 케이크를 한 조각 주지 뭐냐. 거절 할 수가 없어서 먹었더니 배가 부르네."

 "그래요? 그래도 밥이랑 미역국 새로 했는데 따끈할 때 조금 드세요. 고려인 반찬도 샀거든요."

 "그래."

 정말로 배가 하나도 안 고팠던 성제오빠는 내가 밥을 새로 한 것에 대해 미안했는지, 접시에 자신이 먹을 분량들을 담아 다시 온라인 스터디를 하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마저도 이튿날 아침에 보니 거의 먹지 않았다. 성제오빠가 상대방의 호의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에, 예의상 먹는 척 하려고 좀 가져간 것 같았다.  

 

 주원이랑 엄마랑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성제오빠가 대뜸 나왔다.

 "은주야. 혹시 여기 온천갈래?"

 "지금요? 지금 이미 저녁 7시가 다 되어 가는데 괜찮을까요?"

 "아, 여기 온천은 12시까지 열어. 그리고 저녁에 가야 제맛이다."

 "여기서 가까운가요?" 

 "택시타고 20~30분만 가면 있다."

 내일 또 심야버스를 타야 하는데, 오늘 해가 다 지는 저녁에 5살 애랑 친정엄마를 모시고 어딘가를 또 택시타고 가는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치면 자꾸만 아무것도 안 하게 될까봐 가겠다고 했다. 

 

 약속했던 시간인 저녁 8시가 미쳐 안 되었을때, 이미 택시가 우리 호텔 앞에 와있었다. 택시기사는 성제오빠를 보더니 "승제~" 하며 손을 건넸다. 여기 키르기즈사람들은 모두 성제오빠를 승제라고 불렀다. '성'발음이 없나? 승제라고 다들 성제오빠만 보면 반가워하는게 은근 친밀감도 있고 보기 좋았다. 택시기사는 성제오빠의 카라콜 친구라고 했다. 딸내미가 중국어를 잘 한다고 귀뜸을 해주었다. 

 

 저녁 8시, 아직도 해가 지지 않았다. 우리가 악수로 떠났을때의 6월의 일몰시간은 저녁 8시 26분이라 아직 해가 지지 않아서 날이 아직 훤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갔을 법한 시간인데, 가다보니 푸시킨 파크의 놀이동산쪽 불이 환하게 켜져있고, 가족단위의 현지인들이 8시에 푸시킨 파크로 입장하는 모습도 보았다. 샤슬릭 가게도 불을 환하게 키고 있었다. 가게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아이 동반한 일행이 많았다. 우리로 치면 집에서 서서히 씻고 자야 할 시간인데 일몰시간이 워낙 늦어서 그런지 저녁 8시에도 아이들도 저녁 늦게 가족단위로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저녁 8시에 새로운 곳에 가는 느낌은 성제오빠와 함께였지만, 생소한 만큼 두렵고, 또 귀찮고 약간은 피곤했다. 

2022.6당시 카라콜 일몰시간(https://www.timeanddate.com/sun/kyrgyzstan/karakol?month=6&year=2022)

 20여분 정도 직진하고 나니 택시는 우회전해서 다시 구불구불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 중에 어느 집에 택시가 잠깐 멈추었다. 

 "어, 여기 내 친구 친척집인데 잠깐 내려서 인사나 하고 가자." 

 택시기사 아저씨의 이종사촌 형네 집이라고 했다. 성제오빠는 도대체 키르기즈스탄에 얼마나 왔길래 이렇게 구석구석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인가. 같이 다닐때마다 정말 놀라웠다.  택시기사 아저씨의 큰형도 역시 성제오빠를 보더니 "승제!"하면서 악수를 위한 손을 내밀었다. 큰형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일몰이 다 되어 하늘이 검푸르해졌다. 이미 저녁식사는 다 마친 시간인데, 택시기사 아저씨의 이종사촌 형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르속을 한가득 가져와 권했다. 이미 밥을 먹은 데다, 이 저녁에 밀가루 튀긴걸 절대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중앙아시아에 왔으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하기에 나는 보르속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직접 튀긴 거라고 하셨는데, 내일 제사가 있어서 손님 접대 용으로 미리 잔뜩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 저녁에 배부르다고 내가 만든 미역국과 밥도 그득 남긴 성제오빠도 보르속을 손으로 집어 맛있게 암냠 먹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보르속

 "나중에 카라콜에 오게 되면 여기에 묵어도 괜찮을꺼야." 

 성제오빠는  택시기사 이종사촌 형이 운영하는 하숙집 방을 둘러보라고 대뜸 나에게 권했다. 나는 숙소를 고를 때 슈퍼마켓이 있는지 무척 따지는 사람인데, 이 곳은 그야말로 산중 숙소였다. 옆에는 설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콸콸콸 흐르고 있었고, 집 뒤 한 구석에서는 뜬금없이 당나귀 한 마리가 어둠속에 메여서 졸고 있었다.

 "여기가 온천가기도 가까워. 걸어서 20분이면 갈껄. 그리고 계속 다니는 버스도 있고. 슈퍼마켓도 걸어서 20분이면 있을거다."

 "아. 그렇군요."

물론 이 곳은 산상에 있었던 지르갈란 숙소보다야 낫지만,  이곳에 머물다가는 5살짜리 주원이가 심심해서 하루 종일 나나 할머니한테 붙어서 칭얼댈 테고, 게스트용 부엌도 따로 없으니 빵과 고기 위주인 중앙아시아 음식을 주는데로 또 먹어야 할테고, 슈퍼마켓도 멀고 또 규모도 작아서 급하게 뭔가 식재료를 사고 싶은 욕구도 참아야 할 것이고, 매일 온천에 가더라도 온천 가는 버스를 기다리거나 온천에 가려고 차도 옆으로 조심조심 걸어야 할 텐데... 마냥 좋은 척을 할 수는 없었다.

 숙소를 둘러보니, 방과 거실은 1개인데, 응접실이 방의 3배였다. 분명 방은 2인실인데 응접실에는 약 20명은 앉을 수 있을 법한 넓다란 식탁과 아름다운 조명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집 구조였다. 나중에서야 점차 이해하게 되었지만, 무슬림들은 손님을 신이 보낸 것이라 생각해서 잘 접대해야 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손님 접대용 응접실이 가장 화려하고 공간도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온천도 가지 않았는데 벌써 인사하느라고 8시 40분이 넘고 있었다. 성제오빠는 도대체 온천을 언제 가겠다는 것인지, 약간 초조해졌다. 주원이가 저녁 잠시간이 되면 칭얼거리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에 그 전에 모든 걸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차적응을 아직 못한 주원이로써는 8시 40분이 아니라 한국시간 11시 40분을 넘고 있었다. 성제오빠는 거기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손을 건네 인사를 하고, 우리를 소개하고, 보르속을 또 집어서 먹더니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모든걸 천천히 하고 있는 듯한 성제오빠도 날이 저무는 걸 눈치는 챈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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