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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이의 눈은 벌써 반쯤 감겨가고 있었다. 시차 적응을 못한 주원이로써는 키르기스스탄 현지시간인 밤 10시면, 한국시간으로써는 새벽 1시였다. 이미 꿈나라에 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게다가 온천욕까지 한 주원이는 깜깜해진 택시 안에서 점점 나른해졌다.
"이 친구 딸래미가 비쉬케크에서 대학 갔다가 방학이 되어서 카라콜 집으로 왔다고 하네. 네가 중국어 잘하잖아. 딸내미한테 중국어 잘하는 외국인 있다 하니 기다리고 있다고 하네."
밤 10시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모르는 키르기즈 대학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지친 엄마와 눈이 감겨가는 주원이를 보면 지금 이 시간에 현지인네 집에 가는 것은 진정한 무리였지만, 외국인이 온다고 좋아하는 딸내미랑 신나게 통화하는 택시기사 아저씨를 보니, 도저히 못 간다고 할 수 없었다.
택시는 악수를 벗어나 카라콜 주택가로 들어섰다. 밤이 이미 깊어져 주택가의 모든 등도 소등되었다. 택시는 어느 문앞에서 드디어 섰다. 철문이 열리더니, 우리를 기다리던 택시기사 아저씨의 부인이 웃으며 우리를 환영했다. 주원이는 이미 택시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나는 잠이 깊이 든 주원이를 들어앉고 주택으로 들어섰다.
택시기사 아저씨의 집은 기억자 모양을 한 2층 집이었는데, 넓은 마당은 모두 시멘트로 깨끗하게 깔아놓았다. 우리는 한 10명 쯤은 앉을 수 있는 너른 목조 식탁이 있는 식당 겸 부엌으로 안내받았다. 이미 식탁에는 손님 접대용 백설탕, 사탕과 빵이 쫙 펼쳐져 있었다. 나는 일단 잠든 주원이를 식탁 한 켠 넓은 2인용 소파에 눕혔다. 곯아떨어진 주원이는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성제 오빠가 사람이 앉는 소파에 얹어있는 주원이 신발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인지했는지, 주원이의 신발을 벗기라고 눈치를 주었다. 나는 이 시간에 침대에 눕지 못하고, 낯선 사람들 집 소파에서 자고 있는 주원이가 너무 애달팠다. 더불어 내 의지로 이 집에 오지 않아서 그런지 주원이의 신발을 벗기라는 성제 오빠에게 괜스레 서운해졌다. 어쨌든 외국인을 환대해주는 현지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아, 잠든 주원이의 신발을 조용히 벗기고 웃으며 앉아있었다.
손님이 오니 아주머니께서는 찻주전자를 내오시고, 곧이어 삶은 양고기 덩어리를 내오셨다. 양고기는 물기 없이 조금 말라있었는데 그것을 식탁에 접시 없이 부분 부분 펼쳐놓았다. 또 초록색 향신료 채소 2가지도 양고기와 같이 먹는 용도로 부분 부분 펼쳐져 있었다.
고맙고도 까마득했다. 시간은 벌써 밤 10시 30분이었다. 이 시간에는 물도 안 마실 시간인데 양고기와 야채를 펼쳐놓기 시작하시니 이 분들의 환대에 어떻게 보답드려야 할지 난감했다. 더구나 나는 채식주의자인데, 양고기를 먹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성제오빠는 사람 좋게 웃으며, 절대 배고프지 않을 텐데도 양고기 갈비를 한 점 들어 열심히 뜯기 시작했다.
"오빠. 지금 그게 들어가세요?"
내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어떡하냐? 이 분들이 이렇게 차려주셨는데."
성제오빠는 웃으며 조용히 답했다.
아무것도 먹기 싫은 나는 어쩔 수 없이 향신료 야채라도 먹는 방식으로 환대에 보답하고자 했다. 나는 상위에 있는 딜을 들어 열심히 씹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탁 위에는 많은 딜이 남겨져 있었다. 우리 한국에서는 밥을 잘 먹어주는 것이 주인을 위한 예의 아닌가. 배도 안 고픈데 저 많은 딜을 어떻게 하지. 엄마에게 눈빛을 보내어 딜을 권하니 엄마도 마지못해 이파리 하나를 살짝 뜯어가 씹었다. 대화는 오고 가지 않는 깊은 침묵 속에서 나는 뻘쭘함을 견디고자 딜을 먹기 시작했는데, 결국에는 식탁에 있는 딜을 다 먹고야 말았다. 나의 입속에는 딜의 향과 풀 특유의 맛이 진하게 채워졌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내가 딜을 다 먹은 것을 보더니, 갑자기 일어서 부엌에서 나갔다. 그러더니 딜을 또 가져오셨다. 알고 보니 그 집에서는 딜을 화단에 키운다고 했다. 나는 택시기사 아저씨가 화단에서 뜯어가지고 온 딜을 다시 씹기 시작했다. 내일 똥을 싸면 그건 바로 초록색 딜 똥이리라.
딜을 씹다 말고 옆을 넌지시 보니, 엄마는 자고 있는 주원이가 누워있는 소파 한쪽 끄트머리에서 모자를 쓴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딜을 다 먹고 나니 택시기사 아저씨는 마당에 가서 풋마늘대를 잔뜩 뽑아오셨다. 나는 다시 풋마늘대를 씹기 시작했다. 알싸한 맛 때문에 풋마늘대는 딱 하나만 먹고 더는 먹을 수 없었다.
택시기사 딸내미는 20살도 안 되어 보였다. 대학교 1학년이라고 했다. 택시기사 아저씨의 부인이 나보다 2살밖에 많지 않았는데 내 애기는 5살이고, 여기 딸래미는 대학교1학년이라니. 순간 헛살았나 생각이 들었다.
딸래미는 우리에게 홍차를 찻잔에 따라주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따뜻한 차라도 마시는 게 좋겠다 생각이 들어 찻잔을 들어 차를 홀랑 다 마셔버리니, 차를 더 따라주었다. 곧이어 찻주전자가 다 비었는지 주인아주머니는 딸내미에게 뭐라 뭐라 하더니, 딸내미가 벌떡 일어나 찻물을 다시 끓이러 갔다.
이 분들은 키르기스어를 하고, 나는 키르기즈어를 못하고, 한국어와 키르기즈어를 둘 다 할 수 있는 성제 오빠는 연신 말도 안 하고 양고기를 뜯고 있었다. 조용한 침묵이 흐를 때쯤 딸래미가 돌아왔다. 성제오빠는 중매쟁이처럼 드디어 말을 열었다.
"이 딸내미는 아이게림인데, 중국어를 아주 잘한다."
성제 오빠는 나에게 넌지시 눈빛을 보내며 중국어 프리토킹을 하라고 시켰다. 부모님이 시켜서 내보낸 소개팅 자리에서 낯선 상대와 자기소개를 하는 것처럼, 영어학원에서 영어 레벨 테스트를 위해 독방에 외국인 선생님과 1대 1로 독대하는 것처럼, 키르기스스탄 현지인의 부엌에서 나는 낯선 여자아이와 중국어를 해야 했다. 여자아이는 부끄러워서 나를 쳐다도 안 본채 연신 손님들의 찻잔을 둘러보며 빈 찻잔을 찾아 첨잔을 하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부모는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딸을 쳐다보며 딸이 얼마나 중국어를 잘할지 연신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기대에 부흥하고자 중국어로 간단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중국어 배우는 거 재미있어요?"
"언제 개학해요?"
"언제까지 카라콜에 있어요?"
마치 온라인 중국어 선생님이 된 양, 중국어 기초 첫 부분에 실릴만한 간단한 문장 위주로 말했고, 딸내미는 엄청 긴장된 목소리로 질문에 답했다. 중국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어휘는 많지 않아 보였지만, 발음은 깔끔했다. 중국어를 잘하는 딸내미를 보는 택시기사 아저씨 내외의 얼굴에는 기특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끝으로 나는 딸내미에게 부탁했다.
"부모님께 통역해줄래요? 딸이 중국어 너무 잘한다고 말해주세요. 발음도 너무 좋다고요."
"고맙습니다."
딸내미는 얼굴을 붉히며 고마워했고 그 후 키르기스어로 부모에게 내가 말한 본인의 중국어 실력 평가를 통역해주었다. 택시기사 아저씨 부부는 내 칭찬에 더욱 행복해졌다. 택시기사 아저씨 내외가 나를 보자, 나는 엄지손가락을 쳐들으며 최고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텔레그램 연락처 교환하렴. 연락처 교환하고 이제 집에 가자."
인류애가 풍부한 성제 오빠는 오늘 자신이 주선한 키르기스 대학생과 중국어 잘하는 나와의 만남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싶었는지 연락처 교환을 권유했다. 나는 20대 후반부터 점점 냉소적으로 변한 후부터는 친하지 않은 상대와 절대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지나가게 놔두고, 한번 볼 사이도 미리 파악해놓는다. 그런데 지금 이 딸내미와 연락처를 교환하라니... 하지만, 그것이 현지인들의 환대에 보답하는 길이라면 한번 볼 사이라도 연락처 교환할 수는 있었다.
"아이기린, 텔레그램 있어요? 중국어 연습하고 싶을 때 종종 연락해요."
나는 웃으며 말했고, 아이게림은 행복해하며 나에게 연락처를 주었다. 반쯤 졸고 있는 엄마를 깨우고, 완전 꿈나라로 가버린 주원이를 둘러업고 나는 현지인들에게 고맙다고 한 후 택시를 탔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너무 많이 피곤했다. 택시 아저씨는 우리에게 택시비를 받지 않았다. 친구로서 우리를 대했기 때문에 돈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내 방문으로 택시기사 아저씨가 딸내미의 중국어 실력에 잠시나마 행복했다면, 그걸로 약간의 피로는 감수할만하다고 생각했다. 주원이와 엄마와 나는 숙소에 가자마자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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