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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처음 만난 외국인들과 낯선 곳에 가려고 택시에 탄 소녀들은 살짝 긴장해보였지만, 언니와 동생 서로를 바라보며 의지하는 듯 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무해한 외국인으로 분류한 것 같았다. 주원이와 이미 안목을 튼 상태였고, 엄마나 나나 소녀들에게 말을 붙여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영어와 중국어를 하는 나와, 키르기즈어와 러시아어만 하는 소녀들 사이에 공통언어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소녀들과 눈이 마주치면 활짝 크게 웃어주는게 전부였다.
오히려 대화를 시도한건 13살 소녀였다. 나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역기를 이용하여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키르기즈스탄은 어떤지, 비행기타면 얼마나 걸리는지, 한국은 정말 그렇게 잘 사는지 등이었다. 넓은 세계를 아직 보지 못한 소녀에게 최대한 재미있고 상냥한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소녀가 쓰고 있는 러시아계 yandex 번역기는 러시아어-한국어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잘 번역되지 않아서 결국 내 핸드폰에 가지고 있는 사진들로 대화를 이어갔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 내 핸드폰으로 한국 사진을 가지고 있는게 롯데 타워여서 소녀들에게 보여주니, 눈이 동그래져서 매우 흥미있어 했다. 그러나 대화를 계속 이런 식으로 이어 나가는건 정말 피로했다. 소녀들은 궁금한게 많지만 나는 침묵 속에서 창밖에나 내다보고 싶었다.
나는 소녀의 핸드폰 속 번역기에 대고 말했다.
"BTS 좋아하니?"
소녀들은 BTS를 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인터넷이 되는 친정엄마 핸드폰으로 BTS 인기순위 곡들을 쫙 틀어주니, 택시 안은 바로 디스코장이 되었다.
40여 분을 달렸을까? 붉은 사암지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티오구스에 가기도 전에 이미 붉은 사암으로 된 산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좀 더 달리니 일곱개의 황소라는 뜻의 제티오구스가 나타났다. 이미 세계테마기행 키르기즈스탄 편에서 제티오구스를 여러 차례 예습해서인지 기시감이 들었다. 제티오구스는 입장료가 없었다. 입장료가 존재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여기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니 관광은 알아서 하시오 느낌으로 아무런 관광자원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이정표, 안내소, 활동할 수 있는 액티비티 등이 없었다. 마치 제티오구스가 이렇게 말을 하는 듯 했다.
"여기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즐길지는 너가 주도적으로 알아서 해야 해."
그동안 나는 얼마나 게으른 여행자였던가? 그동안 여행했던 다른 나라에서 보통 나는 안내소에 들러 공짜 지도를 습득하고, 이정표를 따라 걸은 다음 돈을 지불하고 액티비티를 즐겼다. 키르기즈스탄에서는 그 때 갔었던 지르갈란도, 제티오구스도 풍경은 스위스 못지 않았지만, 자연만 떡 하니 있는 관광자원이 나에게 왔을 때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했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제티오구스 앞 길 한복판에 우리를 세워주고는 오후 2시까지 여기로 오라고 했다. 아저씨가 집합시간을 제스처로 얘기했지만, 소녀들이 알아듣고는 핸드폰 시계를 보여주며 나에게 확신을 가지게 했다. 갑자기 말 안 통하던 소녀들이 나의 든든한 딸들 같았다. 길 한복판에는 비슷비슷한 중고차들이 좀 세워져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헷갈릴 것을 대비해서 소녀들은 택시번호판도 체크하고 택시기사 아저씨의 얼굴도 기억해놓았다. 소녀들은 정말 대견하게도 러시아어와 키르기즈어 둘 다 못하는 외국인들을 걱정해서 스스로 알아서 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시간은 지금 10시 30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제티오구스에서 2시까지 어떻게 버티나. 제티오구스는 이미 코앞에서 보이기 때문에 사진 찍는 것만으로는 길고 긴 시간을 때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얘들이 셋이었다. 얘네들이 즐거워야 할텐데...
택시에서 내린 내가 순간 멍때리는 걸 보았는지 친정엄마가 주원이의 손을 붙잡고 관광자원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제티오구스 앞에 개천이 있더라. 거기 구경하러 가보자."
제티오구스 앞에는 마을이 있었고, 그 마을 앞에 개천이 있었다. 설산에서 내려온 물인지 회색빛 물살이 힘차게 콸콸콸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개울 앞에 가자 아이들은 스스로 놀잇감을 발견해서 놀기 시작했다. 돌로 돌탑도 쌓고, 돌로 물수제비도 뜨고, 앞에 있는 큰돌을 목표로 돌던지기도 하였다. 제티오구스에서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런 활동들을 한다고 해서 시간이 빨리 가는 건 아니었다. 사진도 많이 찍고, 돌놀이도 많이 했지만 시간은 30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또 내가 멍때리고 있자, 친정엄마가 주원이의 손을 끌고 이번에는 반대쪽 언덕에 올라가서 제티오구스를 조망하자고 했다. 반대쪽 언덕도 제티오구스라는 말이 안 붙여졌을 뿐이지 똑같이 멋있는 사암지대였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온 시 글귀가 생각 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한쪽만 제티오구스라고 붙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쪽에서만 사진찍고 반대편에 똑같이 멋있는 사암은 지나치는 것이다. 어쨌든 이 이름없는 사암 언덕에 올라 우리는 제티오구스를 배경으로 멋들어지게 사진을 찍었다. 소녀들은 둘이 틱톡 동영상을 많이 연습해서인지 사진 포즈도 멋들어지게 잘 잡았다. 사진을 다 찍고, 제티오구스에서 할 건 다했다 싶어 2시까지 또 어떻게 버티지 했는데 그곳에는 줄에 메어있는 당나귀가 1마리 있었다. 소녀들은 당나귀를 이미 많이 만나봤는지 당나귀를 무서워도 하지 않고 다가가서 예뻐해줬다. 주원이도 누나들을 따라 용기내어 당나귀를 만졌다. 당나귀는 몸집은 작아도 500kg만큼 멜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나귀는 초식동물 아닌가. 그 정도 근력을 유지하려고 당나귀는 정말 끊임없이 풀을 뜯고 있었다. 소녀들과 주원이는 풀밭에 가서 이런 저런 잡초들을 뜯어와 당나귀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당나귀는 여린 풀은 어떻게 알고 잘 받아먹었고, 주원이가 뜯어온 강한 나뭇잎은 흥~ 하고 고개를 훽 돌려버렸다. 제티오구스에서 할 수 있는 액티비티 2번째는 바로 당나귀 먹이 체험이 되었다.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당나귀한테 풀을 뜯어 먹이고 당나귀 반응을 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드디어 제티오구스에 도착한지 1시간 30분이나 흘러 12시가 되었다. 아직 택시 아저씨 픽업시간까지는 2시간이나 남아있었다. 제티오구스에서는 시계가 아예 멈춘 것 같았다. 진정 시간이 그리 안 갈 수가 없었다. 멍때리는 나를 대신해 친정엄마는 아래 내려가 무엇이라도 먹자고 그랬다. 주원이는 당나귀랑 1시간이나 놀았음에도 당나귀랑 더 놀겠다며 울면서 떼쓰기 시작했다. 소녀들은 우는 주원이를 보며, 아이가 왜 우는지 묻고는 주원이가 보란듯이 먼저 당나귀와 인사하고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떼부리는 주원이와 비교하니 우리를 잘 따르는 소녀들이 이번 여행의 진정한 동반자들 같았다. 나는 오늘만큼은 소녀들에게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소녀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는 체리나무, 살구나무 등이 고르게 잘 심어져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소녀들은 길가에 열려있는 과실들을 만지고 맛보는데 그 어떤 경계도 없었다. 나무에서 처음보는 과실들을 손으로 따보고, 맛보고, 서로 얼굴을 보면서 맛을 평가했다. 나에게도 권유하면서 맛이 떫지 않냐며 웃기도 했다. 소녀들은 지루한 제티오구스에서도 나무들을 탐색하며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녀들은 나를 대신해 어느 식당에 진입하더니 유르트로 들어갔다. 볕은 강했지만 유르트 안은 시원해서 더위가 금방 식었다. 우리가 앉자마자 보르속과 빵이 자동으로 세팅되었다. 나와 엄마, 주원이, 그리고 첫째 소녀는 샐러드를, 둘째 소녀는 라그만을 골랐다. 우리 든든한 첫째소녀는 러시아어를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빵과 보르속, 샐러드, 라그만을 종업원에게 시켜줬다. 우리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BTS노래를 틀면서 유르트를 뱅글뱅글 돌면서 춤추고 노래했다. 아까 당나귀와 헤어져서 심사가 뒤틀렸던 주원이도 누나들과 춤을 추느라고 너무나도 행복해 했다. 첫째 아이는 먹은 음식값도 착착 알아내서 우리가 지폐와 동전을 세는 것도 도와줬다. 이런 딸이 하나 있다면 정말 부러울 게 없어보였다.
그렇게 유르트에서의 시간은 금방 갔고, 화장실 다녀와보니 택시기사아저씨와 만나기로 한 2시가 다 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아줘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제티오구스에서의 시간은 참 느렸지만, 좀 놀 줄 아는 아이들에게 제티오구스는 어느 유람지보다 더 흥미롭고 재미있는 곳이었다. 제티오구스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노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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