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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더울 조짐이 보였다. 아침 7시에 일어나니 숙소 마당에는 이미 주인집에서 물을 뿌려놓았다. 아침부터 해가 쨍쨍하니, 이것은 바로 동남아에서 느껴본 아침 고요한 더위의 조짐이었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조금이라도 외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침 먹기 전 주원이를 데리고 인근 아파트 앞 놀이터에 다녀왔다. 30분도 안 놀았는데 이미 더위는 스멀스멀 나타나, 슬슬 더워지기 시작했다.
타슈켄트에서는 딱히 보고 싶은게 없었다. 2일간 그저 잘 먹고 잘 쉬다가 계획을 세워서 우즈베크 여행에 나설 참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숙소에 있는데, 인스타그램으로 DM이 왔다.
"너, 타슈켄트야? 도착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말도 안 해줄 수 있어?"
아이비에커였다.
아이비에커, 나의 첫 남자 친구, 짝사랑을 제외하고는 처음 연애해보았던 남자. 그를 보지 못한 지 15년이나 흘렀다.
사실, 나는 어제 초르수 시장에서 엄마와 아이를 사진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를 만나지 않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우즈베키스탄에 왔다는 건 좀 티를 내고 싶었던 걸까? 나의 마음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지난밤 심야버스에서 성제 오빠가 "너 아이비에커 만날 거냐?"라고 했을 때 안 만날 것 같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막상 우즈베키스탄에 오니, 그리고 아이비에커와 바허가 있다는 타슈켄트에 오니, 내가 왔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결혼한 전 남자 친구에게 만나자고 한다던지, 직접적으로 언제 만날까 말하는 건 예의상 어긋난 것 같았다.
그런데 지난 밤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도 아이비에커한테, 그리고 바허한테는 연락이 아예 없었다. 내가 초르수 시장에 있다는 사진에 바허는 '좋아요.'만 눌렀을 뿐, 그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비에커가.. 다음날인 오늘 대낮부터 연락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떨렸다.
"너 어느 호텔에 있는거야? 시간 되면 내가 밥 사줄게."
22살에 중국에서 아이비에커를 만나 친구로서 6개월, 연인으로서 4개월을 만나고 헤어져 그 후로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편지를 4년간이나 주고받았다. 세월이 흘렀고, 남편과 만났고, 그 후로 내 과거를 되짚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회상하지 않은 과거는 잊힌다. 아이비에커를 내가 좋아했는지, 그가 나를 좋아했는지도 그 사실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오히려 그와의 추억들이 현실감이 떨어졌다. 짧았던 국제연애가 이제는 말해도 아프지 않고, 또 그 강도도 어렴풋해져서 아이 비에커의 존재가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에게 연락이 오다니 그리고 그가 내가 묵고 있는 호스텔까지 데리러 오다니..
사실 나는 어제 초르수 시장에 갔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는, 혹시 아이비에커한테 연락이 오지 않을까 인스타그램을 몇 번이나 뒤졌는지 모른다. 어제 연락이 오지 않아, 속으로 정말 재수 없어했다. 그런데 아침 일찍 그에게 DM이 오니, 내 입꼬리가 확 올라갔다.
나는 그의 핸드폰 번호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마침 엄마의 핸드폰에 우즈벡 유심이 설치되어 있어 아이비에커에게 엄마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자 바로 전화가 왔다. 15년 동안 통화 한 번 한 적 없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그대로였다.
"은주, 오랜만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너희들 몇 명이야? 내가 데리러 갈께."
"아이비에커, 너 일할 시간 아니야? 바쁜데 일해~ 나중에 시간 맞춰서 보자."
"너가 여기 왔는데 일하는 게 뭐가 중요하니. 갈게."
"아냐. 너 무슨 사장이라도 되는거야? 일해도 돼."
"그래. 나 사장 비슷한거야."
아이비에커는 11시쯤 나를 데리러 온다고 했다. 벌써 33도였다. 한낮인데도 날씨는 찌고 있었다. 오늘 36도까지 올라갈 예정이었다. 사실 나도 결혼했고, 걔도 결혼했고, 벌써 15년이나 흘러서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심 나는 설렜다. 15년 만에 만나는데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엄마의 BB크림을 찍어 바르고, 립스틱도 발랐다. 1벌 가지고 온 파란색 원피스도 입었다. 걔가 나를 찾아 바로 온다니, 내 자존감도 올라가고 덩달아 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엄마는 걔가 내 전 남자친구인줄 몰랐다.
"잘 됐다. 오늘 36도까지 찐다는데, 걔가 태워준다니. 덕분에 타슈켄트 관광 공짜로 하게 생겼네"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엄마에게 말했다.
11시 조금 넘어서 하얀 쉐보레 자동차를 끌고 아이비에커가 왔다. 15년 전만 해도 아이비에커는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 네모난 안경을 쓰고 있었다. 몸집도 정말 많이 늘어서 피둥피둥 배가 나온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아이비에커!"
아이비에커는 아저씨가 되었지만, 여전히 내 눈에는 잘 생겨 보였다. 뭐가 씌긴 씐 듯했다. 아이비에커는 약간의 긴장을 했는지, 더위를 많이 타서 그런지 막상 나를 보자 활짝 웃지는 않았다.
"우리 엄마고 우리 애야."
쉐보레에 주원이의 유아차를 싣고, 엄마와 주원이는 뒷좌석에, 나는 조수석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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