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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라에서 사마르칸트 가는 기차는 오후 4시 출발이었다. 아침을 먹은 우리는 부하라에서의 마지막날에 가벼운 산책에 나섰다. 모스크도, 이슬람 신학교인 마드라사도, 랴비하우스도 더 이상 흥미가 없었다. 친정엄마는 그저 이 더위를 피해 한적한 공원의 벤치에 앉아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어 했다.
우즈베키스탄은 전체적으로 도시나 주택 조경은 깔끔하고 아름다운 반면, 공원 같은 곳에 사람이 앉을 만한 벤치가 너무 없었다. 공원이 있어도, 나무를 많이 심어 그늘을 조성하기 보다는 번쩍번쩍한 건축물로 승부를 보는 느낌이었다. 반면, 키르기스스탄은 공원이든 도시든 다소 무질서하고 인도도 갈라져있어서 잡풀이 군데군데 나있는 반면, 공원은 늘 수많은 벤치들이 있었다. 물론 벤치조차 관리가 안 되어 있어서 의자가 깨져있거나 칠이 벗겨져 있었지만, 늘 공원이 즐비해서 여름에 쉬어가기 좋았다.
공원찾아 부하라를 나선 지 30분 만에 공원 같은 곳을 발견했다. 무성한 나무들 사이사이에 몇 개 되지는 않았지만 벤치들이 일정하게 있었다. 그곳은 나중에 알고 보니 부하라 주립대학(Bukhara State University) 초입 공원이었다. 평일인데도 여름 방학이어서 그런지 대학교 초입 공원에 앉아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우리가 대학교 조경을 독차지했다. 공원 내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검은 돌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너무나도 뻔하디 뻔한 공부에 관한 문구가 돌들에 3개의 언어, 영어, 러시아어, 우즈베크어로 새겨져 있었다. 기회는 오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오늘 걸으면 내일은 달려야 한다. 등 딱 한번 읽기만 해도 스스로가 게으른 사람으로 느껴지는, 그러나 역으로 공부하기 싫게 만드는 그런 문구들이었다. 낭만이라고는 하나 없는 구색만 갖춘 공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나무 없는 우즈베키스탄에 너무 지친 나머지, 매우 촌스럽고 진부한 공원이었지만 그나마 있는 벤치와 나무의 조합이 너무 반가웠다. 엄마는 자리잡고 벤치에 앉아 엄마가 한국에서 다운로드하여온 피아노연주곡을 틀었다. 엄마는 벤치에서 물도 마시고, 또 일기장을 꺼내 우리의 지난 여정을 볼펜으로 써 내려갔다. 우즈베키스탄은 더워서 나무를 떠돌아다니는 새도 없는지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끔 엄마가 튼 피아노연주곡에 인위적으로 삽입되어 있는 새소리가 귀에 청량함을 더했다.
공원의 한쪽에는 노출형 관개수로가 흐르고 있었는데, 주원이는 철제다리 위로 올라가 관개수로에 흐르는 물에 돌이나 나뭇잎을 던지면서 자신의 놀잇거리를 찾았다. 나는 엄마의 옆 벤치에 앉아 멍때리고 있었다. 더위에 지친 우리 셋은 공원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방전된 에너지를 다시 충전할 수 있었다.
부하라의 약국에서 감기약을 사서 복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감기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감기라는 건 감기약을 먹어서 낫는게 아니라는 걸. 산티아고도 혼자 걸어서 완주하신 엄마는 중앙아시아 와서는 영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코를 푸는 휴지를 늘 가지고 다니며 코를 풀었고, 수시로 기침을 했다. 무엇보다도 사진을 찍을 때 빼고는 먼저 웃는 일이 없었다. 주원이도 감기 증세가 보였다. 엄마와 주원이는 한 침대에서 자는 만큼 감기에 걸려도 같이 걸렸다. 우즈베키스탄의 여름은 너무나도 더워서 주원이는 늘 볼이 벌겠다.
공원에 앉아있는 나는 너무나도 외로웠다. 멍하기도 했다. 퇴사하고 별 다른 생각 없이 온 중앙아시아 여행이었지만, 여행 내내 즐겁다는 생각보다는 하루 하루 보낸다는 느낌이 강했다. 환전, 길 찾기, 일정안배, 예약, 요리, 주문, 짐 들기 등 나는 가이드, 포터, 물주, 요리사, 통역 등을 겸임하고 있었다. 게다가 타슈켄트에서 있었던 일들은 나의 잊어버렸던 과거를 마구마구 헤집어 놓았다.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지 않는 반면, 순간적으로 멍해지는 것으로 내 뇌를 비우는 습관이 있는 듯했다. 공원에서 나는 외롭고 힘든 만큼 멍해졌다. 나는 아무래도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하고 회사를 잊기 위해 여행에 온 걸까? 주원이와 친정엄마와 추억을 쌓기 위해 온 걸까? 중앙아시아에 관심이 있어서 온 걸까? 여행이 힘들게 느껴지니 자꾸만 근본적인 질문이 들었다.
엄마는 벤치에 앉아 일기를 다 쓰고 물도 마시더니 원기회복이 조금 되셨는지, 관개수로에 돌을 던지고 있는 주원이에게 다가가 관개수로에 발담그기 놀이를 하게 해 주셨다. 주원이는 관개수로의 물에 발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이미 저세상 재미를 느꼈다. 까르르르 웃는 주원이를 보자 여행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멍해하던 나도 제정신이 들어 관개수로에서 장난치는 엄마와 주원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잠깐의 허접한 공원에서의 휴식이었지만, 방전된 나의 에너지는 어느 정도 충전이 되었다. 숙소에서 짐을 정리하여 체크아웃을 한 나는, 한국에서 가지고 온 미역을 불리고, 어제 슈퍼에서 산 오이와 토마토, 식초, 식당에 배치되어 있는 설탕을 가지고 금방 미역냉국을 만들었다. 슈퍼에서 사 온 라면도 끓여 냉라면을 만들었다. 숙소 냉장고에 어제 얼려둔 얼음큐브들도 둥둥 띄우니 그럴싸한 미역냉국이 되었다. 체력이 달려 웃지 않았던 엄마도 미역냉국을 보자 웃으며 말했다.
"뭐든지 척척 금방금방 해내는구나. 맛있네."
숙소식당은 야외라 매우 더웠다. 볼이 벌건 주원이와 엄마가 미역냉국라면을 후루륵하는 모습을 보자, 오전 내내 쳐졌던 기분이 살짝 올라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 이번 여행에 온 것도 아니었고, 중앙아시아에 딱히 관심이 있어서 온 것도 아니었고, 그저 이 여행이 내 운명에 있었기에 온 것이라는 것을. 복잡한 내 머릿속도 그리 생각하니 단순하게 정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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