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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역에 다녀와서 분명 지쳤을 텐데, 엄마는 의외로 부하라의 기념품에 관심을 가졌다. 부하라는 확실히 히바보다 규모가 있고, 실제 부하라의 장인들이 만든 것 같은 이미지를 줬다. 부하라에 비하면, 히바는 기념품들이 히바 장인이 만든 게 아니라 어디서 떼다 파는 느낌이랄까. 

 

부하라의 실크스카프
 엄마는 실크를 파는 곳에 가서 바다향이 물씬 풍기는 실크스카프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 물건에 가격이 명기가 되어있지 않은 시장에서는 상인이 제시한 가격을 깎아야 하는데, 엄마는 상인이 20불이라고 얘기해도 깎을 생각이 아예 없었다. 그저 거울만 보고 스카프가 마음에 들면 살 생각이었다. 

부하라의 실크스카프


 엄마의 생모, 즉 나의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광장시장에서 고기를 파셨다. 시장에서 온종일 물건을 파는 건 참 고된 일인데, 여름에는 땡볕에서 파리를 쫓으며 더위 속에 버텨야 하고, 겨울에는 추운 바람 속에 얼굴에 동상이 걸리고 손이 아려도 견뎌야 한다고 한다. 엄마는 전 세계 어딜 가나 할머니가 시장에서 고생하신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인지, 깎는바에야 호구가 되고 싶어 하셨다. 내가 나서서 조금이라도 깎아보려고 옆에서 상인에게 말을 걸었지만, 엄마는 도리어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는! 깎지마. 이 분들도 얼마나 힘드시겠니. 가뜩이나 더워서 손님도 없는데."
 "엄마, 우리가 비싸게 사면 다음에 오는 한국인들도 똑같이 덤터기 쓸 확률이 높아지는 거야."
 엄마는 흥정하자고 설득하는 나를 신경도 안 쓰고, 제값 다 주고 유로로 결재해버렸다. 벌써부터 기념품을 사면 배낭 메고 다니는데 짐이 될 것 같아 말리고 싶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부하라만큼 세련되고 예쁜 스카프를 파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 이 스카프는 너무나도 유용했는데, 1달 뒤 키르기스스탄 토크모크 산장에서 추위에 벌벌 떨 때 반팔만 가지고 온 우리 셋의 생존수단이 되기도 했다.

 

아이가 파는 새가위
 스카프 파는 집 바로 옆에는 대장장이 상점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어른은 없고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되는 남자아이가 상점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는 홀로 손님을 맞이하는데 익숙한듯 손님이 들어와서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상점에는 대장장이가 직접 작업한 것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칼과 가위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었다. 쪽가위 크기보다 조금 큰 새가위를 엄마가 집자, 아이는 바로 가격을 얘기했다. 아이가 제시한 가격보다 좀 깎아줄 수 없냐고 하니,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2개 사면 할인해준다고 했는데, 정말 얄짤없는 표정이었다. 엄마가 2개를 고르자, 아이는 이름을 새겨주겠다며 종이에 우리의 이름을 쓰라고 했다. 쪽가위 사이즈인 가위에 어디 이름 새길 때가 있겠냐마는, 아이는 우리가 종이에 쓴 이니셜을 직접 가위에 새겨주었다. 기계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걸 보니 이 아이도 이미 숙련공인 것 같았다. 다만 새가위에 새겨진 영문 이니셜을 보니, 삐뚤빼둘 소년이 쓴 글씨 같았다. 소년이 진지한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며 직접 새긴걸 보지 않았다면, 낙서했다고 항의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무렴 어쩌랴. 이게 바로 부하라의 진정한 흔적이리라. 

대장장이의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bukhara__blacksmith/) 중간에 있는 소년이 바로 그 우리에게 새가위를 판 그 소년이다.
부하라의 새가위, 이니셜은 상점 아이가 새겨주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보아온 아이들은 정말 어른같다. 표정이나 눈빛이 하나 꿀리는 게 없다. 그만큼 아이들이 어른만큼 노동도 많이 한다. 집안일부터 짐 들기, 상점 지키기 등 중앙아시아에서는 아이도 노동에 적극 참여시킨다. 일하는 중앙아시아 형 누나들에 비해 우리 주원이는 그저 놀 생각만 가득한 아기 같았다. 
 부하라에서 산 새가위마저 정말 여행 때 유용하게 쓰였다. 여행 내내, 질긴 비닐포장 벗길 때, 내 앞머리나 주원이 앞머리가 길어졌을 때, 옷에 실밥이 풀렸을 때, 엄마의 가방 속에서 뿅 하고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 주었다. 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머리카락도 예리하게 싹둑싹둑 잘 잘라졌다. 
 기념품은 그저 예쁜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나의 편견을 무너뜨리듯, 부하라에서 산 모든 기념품들은 우리의 여행 내내 꼭 필요한 무엇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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