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부하라의 낡은 놀이터에서
시티투어버스라는 멋진 목표를 상실한 우리는 부하라의 아르크 방향으로 수로를 따라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부하라 성에서도 일상은 계속되고 있었다. 빵을 잔뜩 자전거에 싣고 어디론가 향하는 할아버지, 점심 무렵 무슬림사원에서 절하는 남자들, 아이들의 학교, 그리고 약간은 삐걱거리는 그네까지... 폭염 속 부하라의 일상은 고요하고 침착했다.
키르기스스탄의 지르갈란 놀이터에서도 그네가 꼭 하나는 의자가 빠져있더구먼,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의 학교 앞 놀이터에도 그네 의자가 빠져있었다. 주원이는 망가진 의자만 보면 뭐가 그리 좋은지 두 봉을 두 손으로 각각 잡고 "아아아아~" 타잔 놀이를 해댔다. 아이랑 여행 다니니 가는 곳마다 곳곳의 놀이터란 놀이터는 다 가본다.
여행을 통틀어 중앙아시아 3개국을 다 다녀보니, 놀이터가 은근 그 지역의 경제력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르기스스탄의 놀이터의 경우 도시/농촌 불문하고, 어린이 놀이터가 한결같이 마치 전쟁 폭격이라도 맞은 듯 낡아있었는데, 이는 어린이에게 투자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즈베키스탄은 키르기스스탄의 놀이터보다는 좀 나은 수준이었지만, 기구들이 꼭 하나씩은 망가져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초반 놀이터에 투자는 하나 정기적인 관리는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9월 즈음 카자흐스탄에 이르러서야 놀이터가 한국사람들이 기대하는 수준의 놀이터가 보이기 시작했고, 놀이터의 개수도 확연히 많았다. 놀이터의 안전 측면에서 카자흐스탄에 이르러서야 놀이터 안의 주원이의 행동반경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음식점 노망난 할머니의 습격
점심시간이 이미 지났을 무렵 우리는 부하라성이 보이는 성 외곽의 한 전통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우즈베키스탄식 테라스에서 쉬면서 주문한 샐러드와 빵을 기다리면서 사진을 찍을 즈음, 레스토랑으로 전동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손녀뻘 아가씨가 입장했다. 할머니와 아가씨는 우리 옆 테라스에 자리 잡았다. 테라스가 신발을 벗어야 하는 구조라 아가씨만 테라스 위로 걸터앉고, 할머니는 올라오지 못한 채 전동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할머니는 직원에게 한 두 마디 묻고는 화장실에 가는지 전동휠체어를 끌고 식당 뒤로 갔고, 아가씨도 보조로 따라갔다.
화장실에 간 것으로 추정되는 할머니와 아가씨는 금새 돌아왔다. 옆에 앉은 우리는 더위에 지쳐 무심하게 샐러드와 빵을 먹고 있었다. 잠시 후 전동휠체어에 앉은 할머니가 고개를 좌우로 돌려 휠체어 바닥을 보고, 또 테라스도 보고 뭔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듯 허둥지둥 되었다. 할머니를 보필하는 아가씨도 같이 찾는지 정신이 없었다. 할머니와 아가씨는 다시 식당 뒤로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할머니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지 못했는지, 큰 소리로 울면서 아가씨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할머니가 우는 게 안쓰러워 주원이한테 할머니 울지 마세요 하며 사탕이나 휴지라도 건네고 오라고 했지만, 할머니의 안중에는 주원이도 안 보이는 듯했다. 아가씨는 할머니 앞에 멀뚱멀뚱 서서 할머니의 울음이 분노로 변해가는 과정을 어쩔 줄 모르고 지켜보고 있었다. 할머니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아가씨에게 악담을 퍼붓기 시작했다. 우리는 현지어를 모르지만, 할머니의 표정, 목소리, 제스처, 그리고 아가씨의 표정만으로 그게 악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태가 심각해졌는지, 직원들도 하나둘 할머니와 아가씨 자리로 몰려와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듯했다.
그때였다. 샐러드와 빵을 집어먹고 있던 내 등짝이 시원해졌다. 분노하던 할머니가 자신의 화를 못 이기고 물을 뿌린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 뒤를 돌아보니, 할머니의 물을 정면으로 받은 건 할머니를 보필하던 아가씨였다. 아가씨의 얼굴과 머리카락, 상의 모두 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직원들도 나에게까지 물이 튀긴 걸 보더니, 할머니를 제지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보필하는 아가씨도 자신도 물을 흠뻑 맞았으면서, 뜬금없이 물을 같이 맞은 나를 인지했다. 아까까지도 할머니가 어떤 악담을 퍼붓던 잘 견디던 아가씨가 드디어 참을성이 바닥났다. 아가씨는 할머니에게 나를 가리키며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현지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아가씨의 어조와 제스처로 추측한 바로 분명 이런 내용이었다.
"이제 그만 좀 하세요. 물이 저 외국인한테까지 튀었잖아요. 물건 잃어버린게 제 탓이에요? 도대체 이게 무슨 민폐에요."
할머니는 그제서야 나를 인지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는 동작을 반복하며 나에게 큰 소리로 사과했다. 레스토랑 사장도 나에게 와서 미안하다고 인사하고는, 다시 할머니가 갔던 것으로 보이는 화장실 방향으로 직원들을 데리고 갔다. 나는 입에 샐러드를 가득 문채 쿨한 척 아가씨와 주인에게 괜찮다고 제스처를 취하긴 했지만, 정말 마른하늘에 물벼락이었다.
그런데 아마도 할머니가 찾던 물건은 할머니의 휠체어와 할머니 몸 사이 구석에 빠져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급격하게 진정이 되더니 몸의 기력이 분노로 다 쓰였는지 기력이 쇠해보였다. 할머니와 아가씨는 그렇게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나는 이 사건으로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는,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노인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거나, 공경을 받는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젊은 아가씨를 연장자가 함부로 대해도 그것은 당연하다고 여길 정도로 젊은 여성은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아가씨는 식당을 나가더니, 우리가 식사를 다 마치고 식당에서 나갈 때에도 여전히 식당 앞 나무 그늘 앞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부하라가 얼마나 덥고 건조한지, 아까 물을 잔뜩 맞은 아가씨의 옷이 모두 말라있었다.
'중앙아시아로 5살짜리 아이와 친정엄마와 3달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하라 얀덱스 택시기사와의 대담 (0) | 2022.12.28 |
---|---|
부하라 요새(Ark of Bukhara) 방문기 (0) | 2022.12.27 |
부하라 시티투어버스는 없었다. / 부하라 유대인 (0) | 2022.12.23 |
부하라에서 마주친 한국 유학중인 우즈베크학생 (0) | 2022.12.21 |
생각보다 답답했던 부하라의 첫날(3) : 약을 사다 (0) | 2022.12.20 |
- Total
- Today
- Yesterday
- 우르겐치
- 부하라
- 곡식가루
- 우즈베키스탄여행
- 한며들다
- 비쉬케크
- 히바
- 키르기즈스탄
- 타슈켄트
- 통역
- 국제연애
- 우즈베키스탄
- 전남친
- 키르기스스탄
- 사마르칸트
- 중앙아시아
- 타슈켄트기차박물관
- 아이와여행
- 물품모니터링
- 카라콜
- 재회
- 타슈켄트한의원
- 한살림남서울
- 유아차수리
- 사마르칸트유대교회당
- 초르수시장
- 아이와함께여행
- 해외여행
- 밥상살림농업살림생명살림
- 첫사랑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