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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라에는 시티투어버스도, 관광객 안내소도 없었다.
전날 봐놨던 시티투어버스 매표소에 가니, 매표소 안에 사람도 없을뿐더러, 사람이 드나든 흔적도 없었다. 어젯밤에는 몰랐지만, 낮에 보니 시티투어버스 포스터도 색이 다 바래있었다. 느낌이 세했다. 주변 주차장 관리아저씨한테 시티버스를 가리키며 물어봤지만, 아저씨는 우리가 말이 안 통하는 걸 알고, 팔로 엑스자를 긋거나, 고개를 옆으로 도리도리 흔들 뿐이었다. 마침 주원이가 화장실에 간다고 해서 유료화장실에 갔더니 유료화장실 관리하는 젊은 여자가 매니큐어를 바르며 막장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여자에게 번역기로 시티투어버스가 어디 있는지 물었더니, 러시아어로 돌아온 답변 역시 없다는 것이었다. 부하라의 희망, 주원이의 사랑, 우리의 시티버스는 운행하지 않는 게 확실했다.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다. 이 여름에 덥기도 하거니와 코로나까지 겹쳐 관광객들이 올리 만무했다. 돈이 되어야 2층 버스를 운행하지.
물론 내가 어제 기대했던 관광객안내소도 없었다. 히바에서도 2일 패키지 입장권만 사면 히바성 전체 맵은 허접하게나마 나누어주었는데, 부하라는 관광객 패키지 표도 없거니와, 무료 배포지도도 없었다. 물론 유료 지도도 없었다. 모든 관광지는 개별 수납을 받고 있었다.
부하라는 히바에 비해 도시가 너무 아름답고 쾌적하길래, 뭐라도 더 있을 것 같다는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시티투어버스만 믿고 아무 스케줄도 짜오지 않는 나는 이 더운 날씨에 막막해졌다. 우리는 해를 피해 레스토랑 랴비하우스에 잠깐 앉았다 가기로 했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랴비하우스
레스토랑 랴비하우스(Lyabi_Hauz)의 테라스는 정말 끝내줬다. 히바의 레스토랑 테라스에 비견할만한 멋진 식당이었다. 카페 한가운데 연못에는 오리들이 몇 마리 있고, 연못을 둘러싸고 수시로 나오는 물줄기는 청량감을 더했다. 연못에 둥실둥실 떠있는 부하라 상징 조형물도 페인트가 좀 벗겨져 있었는데, 오리들이 이곳에 소풍을 종종 다녔다.
한쪽 그늘에 앉아있던 종업원이 어슬렁대며 가져다준 메뉴판은 김밥천국 수준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먹을 수 있는 샤슬릭부터, 라그만 등 식사류, 아이스크림까지 없는 게 없었다. 다만 우리가 중앙아시아 음식에 이미 질린 게 문제였다. 배도 고프지 않아, 그저 주원이 먹을 체리주스만 하나 시키고 호수만 한참을 바라보았다.
랴비하우스의 구글 외국인 후기를 보면, 음식이나 서비스에 불만인듯한 후기가 좀 있는데, 우리는 음식을 시키지 않은 관계로 음식이 실제로 맛이 없는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가 자리를 뜰 때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계산할 때가 되어 종업원에게 메뉴판에 있는 체리주스값만 지불하였고, 종업원도 가격이 맞는 듯 인사를 했으나, 우리가 유아차를 끌고 저만치 갈 때쯤 종업원이 급하게 달려와하는 말이 우리가 계산한 금액이 세금이 덜 붙었기 때문에 돈을 더 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이나 캐나다도 아니고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세금가격을 불포함하고 메뉴에 적다니. 뭐 주스값 세금 더 내는 게 일인가. 랴비하우스는 풍경만으로도 이미 제 값을 했다.
부하라에서 유대인의 흔적을 찾아서
피로가 회복될 즈음 레스토랑에서 나와 부하라를 천천히 거닐다가 마드라사(신학교)의 내부만 살짝 개조한 어느 방에 사진작가의 전시실이 있는 걸 발견했다.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수많은 작품들은 부하라의 역사와 현지인들을 담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파는 것으로 수익을 얻는 듯했으나, 오고 가는 관광객이 워낙 없어 보였다. 삐쩍 마른 사진작가는 관광객의 방문이 오랜만이었는지, 낯가리는 얼굴로 우리를 수줍게 반기며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가 불을 켜기 바빴다. 사진작가는 불을 다 켜고 나서, 막판에는 에어컨도 켰다. 부하라의 노인사진이 참 많았는데, 엄마는 자신이 노인으로 향해가는 길목이라 그런지 현지 노인 사진에 공명했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닌 노인의 흑백사진을 한참 감상하던 엄마는 말했다.
"늙으면 다시 아이로 돌아가는거야."
사진을 보다보니 이게 웬걸, 거기에는 분명 유대인이 있었다. 중앙아시아와 유대인,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조합이었다. 알고 보니 부하라가 소련에 편입되기 전 이곳은 부하라 토후국(Buxoro amirligi)이었으며, 주요 무역로에 자리 잡은 지역 특성상 이곳에는 우즈베크인, 타지크인, 유대인 등 다양한 문화가 존재했다고 한다. 유대인이 많았던 모양인지, 아직까지도 중앙아시아 출신 유대인은 부하라 유대인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부하라에 많이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소련시절 소련이 이민을 풀어주면서 이스라엘로 대규모로 이동했고, 소련 붕괴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 갔다. 소련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독립했을 때, 유대인, 러시아인, 기타 소수민족들은 국가주의와 무슬림극단주의로 핍박받을까 봐 걱정하였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때 부하라에서 23,000명 이상 거주했던 유대인들은 이제 약 150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의 유대인은 많지 않지만, 역사는 흔적을 남겼다. 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부하라 유대인공동묘지(Cemetery of Bukharian Jews)에 묻혀있고, 우리는 방문하지 않았지만 라비하우스와 아주 가까운 곳에 유대인정교회회당(בית הכנסת אוהל יצחק)도 있었다. 궁금해서 더 찾아보니, 부하라 유대인의 음식은 중앙아시아의 음식에도 영향을 받았으나, 고유한 음식도 따로 존재했다. 현재 유대인이 많지 않기 때문인지, 부하라에는 유대인 음식점이 따로 없는 듯했고, 부하라 유대인의 고유 음식을 먹으려면 뉴욕에 가야 한다고 한다.
부하라 유대인과 현지노인들의 사진들을 유심히 본 엄마는 나오는 길에 사진작가의 엽서를 1장당 1달러 정도 주고 샀다. 우리 여행이 2달이나 더 남았는데 배낭여행 중에 저 종이엽서를 손상하지 않고 어떻게 한국까지 가져갈까 싶었는데, 이 엽서들은 타슈켄트 가기 전에 배낭 안에서 물에 젖고 구겨져 결국 버리게 되었다.
부하라 토후국이어서 그랬을까. 유대인이 영향을 줬기 때문이었을까. 부하라는 우즈베키스탄의 다른 도시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일단 연못과 그를 둘러싼 나무들이 정말 많았고, 도시 계획도 아기자기한 낭만이 남아있었다. 어디를 가나 나무와 수로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부하라 유대인 참고자료: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9/dec/24/jews-bukhara-uzbekistanfear-community-will-fade-away
https://www.nytimes.com/2018/04/07/world/asia/uzbekistan-bukhara-jew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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