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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전 키르기즈스탄에 가는 비행기표가 확정되었던 어느날이었다. 이왕 중앙아시아에 가는 김에 내가 중앙아시아에서 만날 사람이 없나 생각하던 차에, 키르기즈스탄의 이웃나라 우즈베키스탄의 15년 전 알고 지내던 바허가 떠올랐다. 중국 교환학생 시절 중국 시안에서 함께 중국어 연수를 하던 친구로, 키크고 마르고 착해서 약간은 히마리가 없이 느껴지는 남자아이였다. 나랑 동갑인데다 착해서 밤에 PC방 갈 때 보디가드로 호출해서 부르던 친구였다. 15년 만에 연락하는게 가능할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르고, 단 한번도 연락을 주고 받은 적도 없다. 나는 애 낳은 아줌마의 뻔뻔함으로 페이스북에 메시지를 남겼다.
"바허!"
"안녕."
"나 엄마랑 애기랑 좀 이따가 여름에 키르기즈스탄 갈지도 몰라. 너랑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안녕. 나 키르기즈스탄에 안 살아. 우즈베키스탄이라고."
15년 만에 연락한 바허의 무뚝뚝함에 나는 순간 얼어버리고 말았다. 일단 환영하고 볼 것이지, 내가 키르기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서로 헷갈린 줄 아나. 설령 내가 헷갈렸다 하더라 치더라도 그런 띠꺼운 반응은 뭔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바허의 반응도 이해가 간다. 만약 외국친구가 일본에 가면서 한국에 있는 나에게 연락해서, 자기가 일본에 가니 한국에 있는 너하고도 만날 수 있지 않냐 연락오면, 나 일본이 아니고 한국에 살거든? 하고 나라도 발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내 입장에서는 '스탄'이 붙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언어도 서로 비슷하거나 통하고, 유목민이라는 관점에서 문화적 유사성이 있어 보여 친근감을 표시한 것인데, 나중에 알고보았더니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즈스탄은 서로 싫어하는 사이라고 한다. 바허의 무뚝뚝한 반응에 나는 순간 얼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 할 수는 없었다.
"어. 나도 알아. 근데 키르기즈스탄이랑 우즈베키스탄이랑 가깝잖아. 아마 가게 되면 나 7월에 가게 될껄? 그 때 볼 수 있음 보자. 내가 밥쏠께."
바허는 나의 메시지에 아무런 답이 없었다. 솔직히 너무 재수가 없었다... 아니, 오랜만에 연락했기로서니 반가운 반응도 하나도 없고, 마지막 메시지에는 심지어 답도 없다? 키르기즈스탄에서 3달 살기로 생각했었고, 우즈베키스탄은 기회가 되면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허의 반응을 보니 우즈베키스탄 가려던 계획은 바로 취소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키르기즈스탄에 도착했어요!]라는 인스타그램에 답을 남긴 사람은 바허도 아니고 아이비에커였다. 아이비에커는 중국 서안에서 유학할 시절, 바허와 함께 살던 우즈베키스탄 룸메이트였다. 아이비에커도 바허와 함께 나와 나보다 1살 많은 유진언니와 한 반이었다. 키 크고 마른 바허와 달리, 아이비에커는 살짝 통통하고 키가 작았는데 무척 웃기던 친구였다. 1학기 때는 우리는 모두 친한 친구였지만, 여름 방학 때 아이비에커가 나에게 호감을 표시한 이후로 2학기때의 우리넷의 우정은 좀 어색해졌었다. 그런 사유로, 이번 여행 전 나는 바허에게는 연락했지만 아이비에커에게 절대 연락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비에커가 댓글을 남긴 것이다.
"안녕. 은주. 너 우즈베키스탄에도 오니."
15년 전 2학기때 나와 아이비에커는 사실 서로 좋아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고, 각자 결혼도 하고 이제는 아이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전에 만나던 사람들은 한번 헤어지면 서로 연락을 하지 않지 않나? 우리도 그랬다. 아니, 내가 적극적으로 아이비에커의 모든 연락을 차단했었다. 4년 전 내가 주원이를 낳고 나서 주원이의 한복 입은 사진을 올렸을 때, 아이비에커가 "너무 귀엽다. 정말 너 닮았다."라고 헀을 때도, 무플로 대응했던 나다. 그가 인스타그램에서 나를 팔로우 하던 말건 나는 완전히 아이비에커를 차단했었다. 그런데 4년 만에 아이비에커는 다시 댓글을 단 것이다.
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키르기즈스탄에 왔다. 13년간 다니던 회사에 대한 마음 정리 겸 새로운 시작의 의미로 여행을 왔을 뿐, 아이비에커에 대한 생각, 혹은 만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적도 없다. 얼마나 어색한가. 우리는 제대로 이별해본적도 없다. 그런데 지금와서 우즈베키스탄에 친정엄마랑 5살 짜리 아이랑 같이 여행가서 아이비에커를 만난다니.
그런데 이번에는 무플로 대응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룻동안 고민하다가 이렇게 댓글달았다.
"맞아. 갈 계획인데, 언제 갈지 몰라."
아이비에커는 그 이후로 아무런 댓글도 없었다. 나의 댓글의 온도를 읽은듯 했다. 댓글을 남기고도 나는 아이비에커를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인스타그램에 바허는 댓글도 안 달면서 '좋아요'를 눌렀다. 만나기 싫은 아이베이커도 재수없고, 내 페이스북 메시지에 답은 안 하면서 내 인스타그램에 좋아요만 연신 누르고 있는 바허도 재수없었다.
우즈베키스탄은 절대 안 가야겠다고, 혹여 가더라도 아주 조용히 관광만 하고 오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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