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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로 5살짜리 아이와 친정엄마와 3달간

퇴사 결심

수서동주민의 여행일기 2022. 9. 1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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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내내 나는 코로나로 인해 장기간동안 친정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다. 아침에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친정집에 속보로 출근하며 운동을 하고, 오전 근무를 하고, 또 점심시간 동안은 친정집 개와 햇살을 받으며 아파트 단지를 산책했다. 오후 근무가 끝나면 6시가 되기 무섭게 노트북을 정리하고 또 20분간 속보로 걸어 집에 왔다. 친정집은 아파트 14층이었기 때문에 퇴근할 때쯤 저 멀리 산 뒤로 넘어가는 노을도 멋있었다. 가끔 친정 아버지가 출근하지 않으시는 날이면, 나에게 감자나 고구마를 쪄주시거나 과일도 간식으로 주시고, 저녁도 막 지은 밥에 간장에 조린 두부구이나 소금으로 살짝 볶은 담백한 버섯양파볶음를 해주셨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영위한 나의 일상은 그야말로 내가 원하던 삶이었다. 왕복 2시간동안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에서 견디고, 마스크를 쓰고 조용한 사무실에서 8시간을 일하고, 채식주의자인 내가 먹을 거리도 없는 도시에서 삼시세끼를 대충 때우던 지난 삶과는 차원이 달랐다. 만약 이런 삶이 계속 된다면 무엇하나 바랄 것이 없는 완벽 그 자체였다. 

 행복하던 나의 삶은 2021년 10월부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근로자에게 임금명세서 교부 의무화가 시행되면서, 급여시스템 담당자인 나의 업무에 직접적인 타격이 있었다. 임금명세서 교부의무화에 따라 기재해야 할 항목들이 많아져서 시스템적인 변경이 큰 상황이었지만, 회사측에서는 추가 인력투입이 없었고, 나와 함께 일하는 고객 측에서도 요구사항을 정의하는 걸 담당자 미숙으로 아무리 내가 재촉해도, 너무 늦게 해버렸다. 시스템이 엑셀이 아닌 이상, 요구사항을 하루만에 뚝딱 시스템으로 구현할 수 없는 데, 20여개 계열사의 요구사항도 제대로 취합하지 않았고, 그것조차 법에서 규정한 기한을 준수할 수 없을 정도로 늦게 줘버렸다.

 결과적으로 11월 임금명세서 교부 의무화의 시스템 실현을  너무나도 늦게 줘버린 요구사항에 의거해서 나 혼자 20여개 계열사의 모두 다른 요구사항을 바탕으로 해내야 했다. 나는 고객의 늦어버린 요구사항을 수용하면서, 법적인 임금명세서 교부화 의무 시행기간을 지키느라 10월 초부터 조금씩 야근과 주말근무가 시작되다가 10월 말부터 11월 말까지는 거의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게 되었다. 팀에서는 나의 업무가 주력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업무 과도화를 피력해도 다소 무관심했고, 요구사항을 정말 늦게 준 고객은 법준수기간을 지킬 수 있냐며 미안하다고 재차 사과하면서도 나를 재촉했다.

 10월부터 12월까지 나는 때때로 내가 재택근무하는 친정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우리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 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샤워도 못하는 날도 있었다. 더불어 해당 기간동안 지주사에서 요구사항을 정리해주지 않아, 각 계열사에서 나에게 직접적으로 문의가 왔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통의 전화가 나에게 걸려왔다. 내가 고생하는 걸 팀에서는 알아주지 않고, 재택근무였지만 살인적인 노동환경에 시달리고 있었고, 너무나도 많은 민원을 나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이번 변경 외에도 원래부터 하고 있던 업무도 있었고, 심지어는 병행하던 프로젝트도 있었다.

 나는 본래 2년 전 발견한 지병이 있어 2년 전에 이미 질병휴직을 1년 쓴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복직할 때는 재택근무가 가능한지 판단하고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지 따져서 복직한 것이었기 때문에, 새벽6시 부터 밤 12시까지 일하는 근무환경은 더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2달 동안 미친듯이 일한 끝에 나는 나의 지병과 나의 삶과 나의 영혼을 위해 퇴사하겠다고 하였다.  과로사라는 말이 실감이 되던 때였다.  

 나의 지병을 알고 있으면서 그동안 나에 대한 지원을 거의 해주지 못한 팀 상사는 나의 퇴사를 바로 받아들였다. 다만, 대체 가능한 인력이 구해질 때까지 함께 있어달라고 하였다.

 나는 내 업무를 좋아하고 재미있어 했다. 급여시스템이 너무 좋고, 법이 바뀌는게 재미있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너무 좋았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힘들지 않았다면, 나는 꾸준히 들어오는 나의 월급과 친정집에 대한 마음의 부양의 의무, 또 대기업이라는 타이틀을 포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힘든 이 상황이 오히려 나의 운명같았다. 우유부단한 나는 드디어 대학교 졸업 이후 바로 입사했던 회사를 때려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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