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1월 말 나는 임금명세서 교부 의무화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쉴 수 있었다. 이미 그 즈음에는 퇴사 통보를 하고 나니 회사의 과도한 업무도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아이와 바깥에서 거닐며 산책하고 있는데 걸려온 카카오톡 화상전화. 성제오빠였다. 아이와는 화상통화를 많이 하지만, 성인끼리는 화상통화를 해본 적은 거의 없었는데 화상통화라니...
성제오빠는 대학생 때 중국 교환학생 시절 기숙사에서 알게 된 오빠였다. 이 오빠를 처음 본 건 중국 서북대학 학생식당에서였다. 얼굴도 몸도 길쭉해서 말라가지고는 상하의 모두 회색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회색 추리닝도 무슨 나이키나 아디다스에서 산 추리닝이 아니고, 가슴 한켠에 회사 로고 같은게 새겨져있는, 회사에서 운동회나 단합대회 할 때 개인 사이즈만 고려해서 일괄적으로 나누어주는 전형적인 회사 추리닝이었다. 머리 조차 남자만 드나드는 이발소에서 "알아서 정리해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이발사가 바리깡과 약간의 가위질을 동원해서 완성할 수 있는 표준 컷이었다. 물론 염색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당시 22이었던 나에게는 거리감이 너무 많이 느껴지는 30대 초반 아저씨였다.
"코레일 다니시는 분이래. 회사에서 유학 보내준 거라고 하던데."
중국 현지에서 샀을 법한 둥근 스텐 도시락을 든 채, 볶음밥 라인에서 줄 서고 있는 성제오빠를 보며, 친구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아니 무슨 회사원이 한국돈으로 200원짜리 볶음밥 먹으러 학생식당에 다닌담? 나중에 차차 알게 되었지만, 당시 성제오빠는 정치상황상 남북한이 좋았을 때 코레일에서 남북한 철도 연결사업의 일환으로 중국어 가능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 연수 중이었다. 성제오빠는 전형적인 회사원 스타일의 츄리닝을 입고 있었음에도, 대학생인 우리를 하대하거나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밥도 한번 사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마트에서 돼지고기를 삼겹살 모양으로 주문해서 삼겹살 파티라도 기숙사 방에서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북경에서 MBA연수하고 있는 오빠 나이 또래의 친구를 데려와 삼겹살 파티에 흥겹게 합류했다. 15년 전 기숙사 방에서 삼겹살 파티를 하고 있던 성제오빠는 이슬람 문화권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둘 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지만.
나이가 나보다 8살이나 많은 성제오빠는 사슴같은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니는 모습이 참으로 내가 보기엔 참으로 순진무구해보였다. 중문과 전공하던 나는 HSK 고급 자격증만 따면 귀국하는 목표 단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 시안에서는 현지 친구도 사귀지 않고, 때로는 교환학생 중국어 회화 수업도 HSK 시험 일정 앞두고는 듣지 않았고, 여행도 최소한으로 다녔다. 어느날 점심 먹으러 캠퍼스를 다니고 있을 때, 성제오빠는 서북대학 잔디밭에서 여러 중국인들과 둘러 앉아 있었다. 캠퍼스 내에서 소풍이라도 하나 하고 자세히 보니 성제오빠와 성제오빠를 둘러싼 중국인들 모두 얼굴은 진지해가지고 언성도 높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성제오빠는 중국 친구들 상대로 대만이 왜 중국 것이 아닌지 설득하고 있었고, 오빠의 중국 친구들은 중국에서 쇠뇌당한 대로 대만은 중국의 1개의 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당시 성제오빠는 중국어 초급반이었다. 원래 한국말도 느릿느릿하게 하는 성제오빠는 자기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중국어로 더듬더듬 완성해 가고 있었다. 상대방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 성제오빠는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내리깐채, 고개를 천천히 흔들며 자기 주장을 다시 중국어로 작문해갔다. 당시 나의 관점에서는 쇠뇌당한 중국인들하고 대만 얘기했다가 득이 될 것이 뭐가 있다고 저렇게 잔디밭에서 토론하나 했다.
성제오빠는 또 어느날은 우리들에게 친구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고는 학생식당에서 일하는 20살 초반 혹은 20살도 안 되는 직원들을 잔뜩 데려왔다. 성제오빠는 이 친구들이 집이 가난해서 공부도 못하고 학생식당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국에 관심도 많고 공부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한국어도 관심이 많은데 공부할 기회가 없으니, 교환학생온 너희가 한국어도 가르쳐주고 중국어도 서로 배우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HSK만 목전에 있는 나는 친구도 사귈 생각이 없고 방에서 온종일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데, 정말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우리가 관심을 안 보이는 바람에 식당 종업원들하고는 밥 한번 먹고 끝났고, 성제오빠는 종업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성제오빠는 밤마다 운동장을 뛰었다. 물론 회사에서 준 회색츄리닝은 벗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달리기 시합을 하던 성제오빠는 현지 마라톤대회에 회색츄리닝을 입고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하였다. 맑은 눈과 순수한 잘 뛰겠다는 의지만 가지고 그 긴 다리로 황새처럼 뛰었다. 성제오빠는 22살 나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순수 그 자체인 동시에 초원을 가로지르는 한 마리의 야생말 같았다.
당시 기숙사는 1인실과 2인실이 있었다. 1인실은 하루에 7달러, 2인실은 4달러 정도였던 것 같다. 한국에서 온 대부분의 학생들은 화장실이 별도로 있는 1인실에 묶었고, 저렴한 숙박을 원하는 학생들은 2인실에 묶었다. 한국에서 온 직장인 출신 성제오빠는 2인실에 묶었는데, 당시 룸메이트가 20살 짜리 키르기즈스탄에서 온 에르멕이라는 남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키는 정말 멀대같이 커서, 거의 빡빡머리에 가까운 컷을 하고, 붉은 여드름이 얼굴 잔뜩 있는 전형적인 사춘기 고등학생 같았다. 에르맥도 성제오빠랑 같이 중국어 초급반이었다. 성제오빠는 에르맥이 순수하고 착하다며 친하게 지냈는데, 그때부터였을까? 성제오빠는 중국 유학 와서 중국에 빠지지 않고, 중앙아시아 문명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여름방학때는 실크로드를 여행하겠다며 시안부터 둔황까지 육로로 이동하는 여행을 하더니, 2학기 때는 서북대학교에서 살림을 다 빼버리고 위구르어 배우러 위구르에 갔다. 중국어 초급인 성제오빠가 중국어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돈도 안 되는 위구르어를 배우겠다고 갔을 때 그 선택이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성제오빠의 모든 선택에는 농담이 없었다. 단순히 흥미와 순간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선택이 아니었다. 성제오빠는 귀국 이후 몇 년간 코레일을 잘 다니다가 결국 중앙아시아쪽 역사 전공하려고 코레일을 퇴사하고 석박사에 다시 들어갔다.
나에게는 정말 뜬금없는 결정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제오빠가 2021년 11월 말 나에게 카카오톡 화상전화를 했다. 화상전화를 수락하니, 역시나 사슴같은 눈에 키는 멀대같이 커가지고 얼굴도 말처럼 바짝 마른 성제오빠가 반대편에 있었다.
"은주야. 잘 지내냐? 생일 축하한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1년만에 전화온 성제오빠가 나에게 생일을 축하하네.
"오빠, 잘 지내세요? 지금 어디세요?"
"어, 키르기즈스탄이다. 여기 물가도 싸고 너무 좋다. 너도 와."
결국 15년 전 함께 성제오빠와 방을 썼던 에르멕의 나라, 키르기즈스탄에 성제오빠는 살고 있었다. 키르기즈스탄이라. 국가명도 참 생소하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관심도 없는 그 나라에 대해서 나는 뭐라고 호응해야 할지 몰라 살짝 망설이다가 농담으로 말했다.
"오빠. 저 진짜 갈까요?(웃음) 저 이미 회사에는 퇴사한다고 했거든요."
"그래. 키르기즈스탄 정말 자연도 아름답고 볼 것도 많다."
"네. 오빠. 생각해볼께요. 근데 가면 저 애랑 엄마랑 다 같이 가야 갈 수 있겠네요."
성제오빠의 말에 화답차원에서 대충 둘러댔다. 그래 잘 지내고로 30초간의 간단한 화상통화가 끝났다. 키르기즈스탄이라니... 성제오빠 참 멀리도 갔다 생각하고 그 나라이름은 바로 잊어버렸다.
그렇게 성제오빠와의 통화는 잊고 키르기즈스탄도 잊고 다시 업무를 열심히 하고 있던 어느날 이었다. 생일 축하 통화 이후 몇 주 후인 어느날, 성제오빠한테 또 화상전화가 왔다.
"은주야. 안녕! 너 그런데 퇴사가 언제라고?"
"네. 오빠. 후임자 구하기가 어렵고 저 연말정산도 해야 해서 아마 5월 쯤일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그 때 오면 키르기즈스탄 봄이라 정말 아름답겠네."
"네. 오빠. 퇴사 시점에 생각해볼께요. 흐흐"
성제오빠가 민망해 하지 않게끔 대충 둘러댄 것이었는데 성제오빠는 그 모든 것을 진담으로 알아듣고 내가 언제 키르기즈스탄에 오는지 몇달간이나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었다니, 마음에 부담이 확 오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빈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싫다고 했다. 말만 해놓고 실천 안 하는 사람들, 약속을 해놓고 약속을 대수롭게 지나가 버리는 사람들은 정말 상종하기 싫다고 했다. 그런 사람은 절대 되지 말라고 쇠뇌당한 나는 성제오빠가 걸어온 2번째 통화에 완전히 압도 당해버렸다. 내가 첫번째 통화해서 둘러된 말을 다시 복기해보았고 상대방에게 오해의 소지를 준 것이 있나 재차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여지를 준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통화 2번만에 뜬금없이 키르기즈스탄에 갈 수는 없었다. 성제오빠의 성향상 또 화상통화가 올 텐데, 다음 통화에서 둘러댈 말들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키르기즈스탄에 갈 수 없는 이유들을 모두 나열해보았다. 서울에서 키르기즈스탄으로 바로 가는 비행기가 없다, 퇴사 후 바로 취직이 되었다, 남편이 반대한다, 주원이가 오줌을 아직 이불에 싼다 등등... 뭐 하나 내가 세련되게 둘러댈만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통화를 끊고 대충 예의라도 보여주기 위해 항공편을 조회해봤다. 키르기즈스탄까지는 직항이 아예 없고, 카자흐스탄 알마티까지는 7시간 걸리고 그 이후 1시간 동안 다시 비행기를 타면 되는 것이었다. 가격도 나쁘지 않았다. 한 사람당 50여만원이었다. 비행기표가 비싸면 돈이 없다고 핑계를 대려고 했는데 표값도 비싸지 않고, 비자가 필요하면 비자 받기 어렵다고 핑계대려고 했는데 무비자고. 나는 퇴사 후 바로 재취업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이제는 남편 핑계가 좋아보였다. 그 날 밤 자려고 안방에 아이와 도론도론 누워 담소를 나눌 때, 남편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보, 성제오빠가 나보고 퇴사하고 키르기즈스탄에 놀러오라는데?"
"주원이랑 같이?"
"가면, 주원이랑은 같이 가겠지만.."
"자신 있으면 갔다와라."
반대를 생각하며 물어봤는데 남편조차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키르기즈스탄에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뭐 하나 꼭 가지 말아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일단 성제오빠가 다음에 또 연락 올 때까지 다른 핑계를 찾아보기로 했다.
회사에는 분명 2021년 11월에 퇴사한다고 통보하였는데 나는 2022년 4월까지도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남은 동료들을 생각하니 후임자가 제대로 구해질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업무 상 정리가 안 되는 어려운 문제들도 있는데 다음 후임자가 덜 고생하였으면 해서 퇴사 전까지 최대한 정리하고 나가고 싶었다. 퇴사 전 남은 기간 동안 여비나 벌겠다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물론 일은 항상 많았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그런데 문제는 이 후임자가 절대 구해지지 않았다. 대기업이어서 지원자는 많았지만, 회사 임원들이 뭘 잘 못 먹었는지 4명 정도를 순차적으로 다 떨어뜨렸다. 대기업 출신도, 이 업무를 오래 해본 사람도, 동종업계 경력을 가진 사람들도 임원 면접에서 떨어졌다. 2월에 떨어뜨릴때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4월까지도 절대 합격 시키는 법이 없었다. 경력직 입사라는 게 그렇다. 합격해도 그 사람도 전 회사 인수인게도 해야 해서 이직하기 까지 1달은 걸리는데, 아니 4월이 되도록 뽑지 않으면 도대체 나는 언제까지 다니라는 건가?
팀장은 초조해졌는지 나에게 메신저가 왔다. "은주야, 너 언제까지 다닐 수 있니?" 아무래도 이러다가는 내년 12월까지도 쭉 다닐 것 같았다. 임원들도 실무진 면접관들도 내가 이직으로 퇴사하는게 아니니 마음에 여유가 넘쳤던 건가. 이렇게 족족 떨어뜨리면 내가 꿈꿨던 아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인수인계, 아름다운 byebye는 다 날라가고 급박한 인수인계와 퇴사만에 남은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 아예 11월에 퇴사 통보만 하고 퇴사통보 하고도 1년을 더 다닐 셈이었다. 그 때 갑지기 키르기즈스탄이 떠올랐다. 키르기즈스탄이라도 핑계를 대야 하나? 그래도 아직 키르기즈스탄은 갈 생각도 없었다.
"글쎄요. 제가 이직으로 그만두는게 아니라서 퇴사시점이 딱 정해진 건 아니에요. 그래도 6월까지는 후임이 뽑히지 않을까요?"
팀장은 안심하였다.
"그래. 고맙다."
퇴사의 핑계로 키르기즈스탄이라는 단어가 내 뇌리에 살짝 스칠때쯤 성제오빠한테 또 전화가 왔다.
"은주야. 너 언제 도착이냐."
성제오빠는 내가 비행기표라도 끊은 것으로 이미 오해하고 있었다. 참 앞서서 오해하는 성제오빠였다. 그런데 이쯤 되니 정말 키르기즈스탄이 내 운명에 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우주가 나를 키르기즈스탄으로 보내려고 준비하는 것 같았다. 지난 11월부터 있었던 모든 일들은 사실 나를 키르기즈스탄에 보내주려고 벌어진 일들일까?
"오빠. 저 아직 비행기표 안 끊었거든요."
"그래. 내가 지금 연구소때문에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있거든. 너 오면 키르기즈스탄에 잠깐 가려고 한다. 확정되면 알려주렴."
성제오빠는 나 때문에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즈스탄을 왔다갔다하는 일정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같이 느껴졌다.
"네. 오빠 발권되면 말씀드릴께요." 내 무의식이 알아서 대답해냈다.
그 날 나는 친정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키르기즈스탄에 갈래?" 내가 키르기즈스탄에 가려면, 5살짜리 아이를 데려가아 했고, 5살짜리 아이를 데려가려면 나 혼자만으로는 안 되었다. 육아동반자인 엄마의 도움이 필수였다.
엄마조차 너무 대수롭게 말했다. "그래. 가." 키르기즈스탄이 무슨 옆동네 이름인가? 엄마의 반응조차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쯤되면 키르기즈스탄은 내 운명에 있는 것인가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나는 비행기표를 예약했고, 그 주에 5살짜리 아이 여권을 만들고 비행기표 확정을 했다.
6월 13일 출국이었다.
'중앙아시아로 5살짜리 아이와 친정엄마와 3달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설픈 성제오빠와 CG같은 설산이 기다리는 비쉬케크 (0) | 2022.09.21 |
---|---|
폭우가 내리던 알마티공항 (1) | 2022.09.21 |
인천공항에서의 오줌 참사 (0) | 2022.09.17 |
허접한 출국 준비 (1) | 2022.09.16 |
퇴사 결심 (0) | 2022.09.15 |
- Total
- Today
- Yesterday
- 카라콜
- 아이와함께여행
- 한살림남서울
- 전남친
- 비쉬케크
- 히바
- 우즈베키스탄
- 사마르칸트유대교회당
- 재회
- 부하라
- 첫사랑
- 물품모니터링
- 한며들다
- 통역
- 우르겐치
- 초르수시장
- 사마르칸트
- 우즈베키스탄여행
- 유아차수리
- 밥상살림농업살림생명살림
- 해외여행
- 키르기스스탄
- 아이와여행
- 중앙아시아
- 키르기즈스탄
- 타슈켄트
- 곡식가루
- 국제연애
- 타슈켄트한의원
- 타슈켄트기차박물관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