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타슈켄트에서 머물던 때 우즈베키스탄의 명절 이드 알아드하(Eid al-Adha)가 시작되었다. 이드 알아드하(عيد الأضحى)는 이슬람교의 중요한 정규 축제 중 하나로, 이슬람력 12월 10일에 열리는 제물을 바치는 축제라고 한다(출처:나무위키). 사실 히바,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거치며 다시 타슈켄트에 오는 동안 나는 우즈베키스탄 명절이 도래함을 알게 되었는데, 평소 외국 현지인 친구들과 많이 교류해본 나로써는 명절에 아이비에커나 바허가 자기네 전통명절을 쇠는 일에 우리를 초대하겠지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허는 나의 친구였음에도 15년 전 '쾅쾅쾅 PC방 사건' 이후 지금까지도 나에게 절대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않았다. 당시 바허의 룸메이트였던 아이비에커가, 나한테 화를 내고 나..

소시지를 회상하다 아이비에커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건 한낱 소시지 때문이었다. 15년 전 여름, 나는 외국인 기숙사 앞에 주차되어 있는 대형버스에 올라탔다. 이미 우즈베크 친구들끼리 얘기를 다 해놨는지 아이비에커의 옆자리가 비어있었고, 아이비에커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나를 불렀다. 나는 기웃기웃 대다가 아이비에커 옆에 앉았다. 중국 지방정부 관광청은 지방도시 홍보의 일환으로 막 개발이 완료된 관광지는 외국인들을 대거 초청해서 관광을 선보이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는데, 외국인으로 동원하기 딱 좋은 대상이 바로 외국인 유학생들이었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고, 지방정부와 연계된 학교에 연락만 하면, 무료여행을 원하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어딘지도 모르고 1박 2일 무료여행버스에 올라탔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성제오빠의 일침 그날 밤 나는 도저히 심란해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힘들고 고민되는 일은 나의 세상 최고의 절친인 우리 남편에게 말해왔지만, 이번만은 말할 수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지만 연애경험이 많지 않은 유진언니에게도 할 수 없었다. 무슬림을 이해하고, 남자를 이해하고, 나와 아이비에커 둘 다 아는 성제오빠 밖에는 답이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호스텔의 마당에 홀로 나와 성제오빠한테 텔레그램으로 전화했다. 오빠 잠시 시간 되세요? 어 그래... 오빠에게 한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평소에는 조선의 선비처럼 진중하고 차분한 성제오빠가 여전히 진중한 목소리로 차분하고 느리게 발끈했다. "이거 미친놈 아니야!" 성제오빠는 내가 아이비에커의 차에서 거절한 메시지에도 문제가 있다고 ..
숙소의 정원에 배치된 나무의자 한편에 앉은 타지키스탄 출신 7세 자파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루종일 핸드폰으로 온라인 게임 중이었다. 자파는 할머니와 같이 호스텔에 장기 투숙 중이었다. 타슈켄트가 역사적으로 보면 사마르칸트나 부하라에 비해 신생 도시다 보니, 타슈켄트를 보기 위해 장기 투숙하는 여행객이 매우 드물었다. 타슈켄트는 여행객들에게는 다른 나라나 다른 도시로 넘어가기 전 잠시 머무는 거점 도시였다. 서양 여행객들은 타슈켄트에서 환전도 하고, 짐 재정비도 좀 한 뒤 각자의 루트로 다시 여행을 떠났다. 이 호스텔에 장기투숙하는 건 자파와 할머니, 그리고 우리뿐이었다. 자파와 할머니는 관광이 목적이 아닌 듯 하루 종일 호스텔에 머물렀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발목까지 덮는 긴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는 ..
"나는 니가 나를 숨기고 싶어하는 줄 알았어. 심지어 나는 그 때 니가 나를 동정하는 줄 알았어. 여름방학 내내 나 혼자 기숙사에 틀어박혀서 하루종일 공부만 했잖아. 그래서 불쌍해서 나를 챙겨주는 줄 알았어." "오해해도 어떻게 그렇게 오해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카페에서 밥을 먹으며 나누었던 대화들이 머리속에 맴돌았다. 같은 과거를 겪었음에도 서로 기억하는 바가 너무 달랐다. 부잣집 도련님 출신 아이비에커는 집이 부유해서인지 당시 현재만 생각했고, 나는 엄마가 아프시고 경제적으로도 집이 어려운 상황이라 미래만 생각했다. 아이비에커가 사랑한다고 해도, 나는 이미 너무 왜곡되어있었기 때문에 온전히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 여름밤,..
어두컴컴한 식당에서 나오니 아직 바깥은 볕이 쨍쨍했다. 15년 만에 만나 밥을 먹으며 미친듯이 대화를 나누다 환한 바깥으로 오니 현실로 복귀한 듯 했다. 짧은 시간에 밥먹다말고 나는 포효했고, 그도 포효했다. 다시 미술관으로 돌아가 그가 주차해놓은 검은 쉐보레에 유아차를 실었다. "이제 호텔로 돌아갈꺼지?" "그래." 지난 날 못했던 말들을 일순간에 모조리 뱉어버렸기 때문일까. 날씨가 너무 더워서일까. 나는 맥이 풀려버렸다. 주원이와 나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타슈켄트 시내를 둘러보았다. 우즈베키스탄의 차 90%를 차지한다는 모든 종류의 쉐보레가 콘크리트를 질주하고 있었다. 시내에는 광장이나 공원이나 걸어다니는 사람이 적었다. 40도가 넘어가는 날씨에, 이 한낮 땡볕에 거리를 활보하는 건 우리같은 관광객..
옛날 사람들을 만나면 옛날 얘기를 하게 된다. 우리 남편도 초등학교 때부터 만난 친구들과 만나면, 어릴 때 자기 담임이었는데 교회집사님이기도 해서 아이들을 교회로 인도했던 담임선생님 얘기를 아직도 한다. 대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대학교 때 얘기를,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고등학교 얘기를 하게 된다. 말하다 보면 그때 그 시절의 영혼이 슬그머니 나이 든 나의 몸을 뚫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친구들의 몸에서 나온 어린 영혼들을 만난다. 그러다 보니 아이비에커의 20대 영혼도, 나의 20대 영혼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여름방학때 기숙사에 혼자 남겨진 나에게 뜬금없이 찾아온 아이비에커는 생각하지도 못한 변수였다. 23살이던 나는 그때까지도 단 한 명의 남자와 사귀어본 적이 없었는데,..
차별은 차별을 낳고 "당신은 위구르 사람 아닙니까?(你不是维吾尔族吗?)“ 아이비에커와 바허와 함께 서북대학 교정을 걸을 때면, 복장만 보더라도 중국학생들은 우리가 외국사람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챘다. 적극적인 중국 학생들은 가끔 한국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발걸음을 세우고 말을 걸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나면, 중국학생은 시선을 아이비에커와 바허한테 바꾸고 물었다. 너네는 위구르인 아니냐고. 그러면 위구르인 취급을 당한 아이비에커와 바허는 표정이 굳은 채 말했다. "아니요. 우리는 우즈베키스탄 사람입니다. 위구르인 아니에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중국에서도 위구르인을 향한 경멸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었다. 위구르족은 도둑이다. 위구르인은 거리에서 소매치기를 많이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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