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라스에 꽃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카페는 늦은 점심을 즐기는 사람들로 야외테이블이 어느 정도 차 있었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를 식히느라, 야외 지붕에 설치된 스프레이는 끊임없이 분무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장식과 시원한 분무시스템 속에 널따란 나무의자에서 천천히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여유로워 보였다. 더위를 많이 타는 아이비에커는 로맨틱한 여름 야외테이블은 쳐다도 보지 않고, 에어컨을 찾아 실내로 곧장 들어갔다. 실내 테이블은 야외테이블에 비하면 앉아있는 사람이 적었는데, 실외로 연결되는 문이 열려있어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비에커는 더운지 눈을 끔벅끔벅 뜨면서, 이마를 만져댔다. "아이비에커, 피곤해?" "아니, 너무 더워서... 우리 자리 옮기자." 앉은지 5분 만에 ..
"곧 도착해." 아이비에커의 전화를 받고 나는 3층에서 다시 1층까지 한 손에는 유아차와 짐을 들고 한 손으로는 주원이의 작은 손을 잡고 계단을 낑낑대며 내려왔다. 관람료 낸 걸 생각하면 1, 2층의 전시물을 더 보고 싶었지만, 아이비에커도 바쁜 시간을 빼서 오는 게 분명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에라. 모르겠다. 국립예술박물관은 화장실이 층마다 없었기 때문에 1층 복도에 있는 화장실 앞에 유아차를 잠깐 주차해 두고, 주원이의 소변을 뉘었다. 손을 씻고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화장실 바로 앞 의자에 노란 곰 한 마리가 등을 숙이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노란 폴로 카라티를 입은 아이비에커였다. "아이비에커! 우리가 여깄는줄 어떻게 알았어?" "하하. 너희가 어디에 있는 줄 나는 다 알지." 아이비에커는 ..

다시 돌아온 타슈켄트 "드디어 왔구나(你终于来了)。 어딘지 알아. 지금 갈게." 아이비에커의 전화였다. 아이비에커의 전화를 받은 나의 얼굴은 만면에 미소가 지어졌다. 옛 친구가 내가 어딘 줄 얘기하자마자 자기 일정 다 때려치우고 온다니... 설렘과 반가움, 기쁨이 교차했다. 히바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내가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말도 안 되는 설렘에 나도 당황스러웠다. 아이비에커의 전화를 받은 나는 우즈베키스탄 국립 예술 박물관(O'zbekiston Davlat Sa'nat Muzeyi) 5층이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우즈베키스탄 여행을 다 하고 나서, 바로 다시 본 목적지인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갔어야 했지만, 엄마의 기침이 잦아들지 않은 상태에서 또 한 번의 육로 국경이동은 무리였다. 우리는 엄마의 건강..

"한국에서 왔어요?" 이번에는 청바지에 노란 티셔츠를 걸쳐 입은 현지인 남자였다. 남자는 한국사람이냐고, 자신은 한국에 가봤고, 한국에서 일했다는 방금 전 우리에게 말 걸었던 사람과 동일한 레퍼토리로 우리를 붙잡았다. 주원이와 단둘이 카페에나 가서 시원한 거나 마시고 좀 쉬려던 여정이 자꾸 발목 잡히니 곤란했다. 하지만, 한국이 좋다는데, 한국사람만 보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 순박한 호의를 매몰차고 싹수없게 거절하는 게 맞을까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한국어는 아주 필요한 몇 마디 빼고는 배우지 않았는지 내가 조금만 길게 얘기하면 미간을 세우고 알아들으려 노력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슈흐랏이었다. 슈흐랏은 지금까지 일하느라고 결혼하지 않았는데, 한국의 답십리 공사장..

저녁을 먹고 호텔에 다시 들어가 보니 엄마는 여전히 침대에서 누워계셨다. 하루종일 혼자 있게 해 드렸으니 엄마가 조금이라도 호전되었기를 기대했지만, 엄마는 여전히 기력이 없고 기침을 온몸을 흔들어가며 하셨다. 호텔방에는 유튜브가 연결되는 최신 TV가 있었는데, 남편이 외도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들이 자살했습니다 등에 대해 법륜스님이 해설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추천리스트에 떴다. 한글 자판을 입력하는 방법을 알려드렸더니 온통 법륜스님 유튜브만 잔뜩 보셨나 보다. 엄마는 너무 힘들 때마다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위로받고는 했는데, 법륜스님을 찾았다는 건 그만큼 기진맥진한 상태인 것이다. 엄마는 기력이 없어, 온종일 내가 전날 해놓은 밥과 고추장, 마늘장아찌로 식사를 하셨고, 조금 일어날 수 있겠다..

"지금은 헤어졌어요. 너무 서로 사랑했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 하지라드 키즈르 모스크에서 나와, 유대인 회당을 찾아 다시 비비하눔 모스크가 있던 거리로 돌아갔다. 유대인 사당은 관광지의 주요 인도에서 벗어나, 거주민들의 주거지 사이에 있었다.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유대인 회당 방향을 가리키는 표식 하나 없었고, 주거지 골목 입구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모두 현지인들이라 찾아가면서도 긴가민가하면서 걷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어느 청년이 말을 걸었다. "어디 가세요? 한국인이세요?" 돌아보니 키크고 잘 생긴 우즈베크 청년이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뿔테안경을 쓰고, 깔끔한 체크난방과 하늘색 청바지를 입고는 두꺼운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옷 입은게 한국 대학생 스타일이었다. "저도 한국에 5년간 유학했었어..

사마르칸트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관광지인만큼, 현지인 관광객들이 외국인관광객보다 훨씬 많았다. 거의 다 가족단위의 여행객들이 많아 보였는데, 아기를 손으로 들쳐 안고, 노인을 모시고 이동하는 모습이 딱 봐도 대가족이었다. 시압바자르에서 나오니 현지인 관광객들이 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고가도로 위 다리를 건너가니 지대가 높은 곳에 하즈라트 키즈르 모스크(Hazrat Khizr Mosque)가 있었다. 이곳은 문화유적임에도 별도의 돈을 받지 않았는데, 문화유적치고는 시설이 깨끗하고 현대화되어 있었다. 지진으로 파괴된 뒤 절대 복구되지 않는 비비하눔 모스크와 비교가 될 정도였다. 너무 정비가 잘 되어 있어서, 마치 우리나라의 웨딩홀 중 유럽 성 양식을 모방해서 지은 건물 같기도..

티티하눔 모스크 바로 옆에 위치한 시압바자르로 갔다. 시압바자르는 역사는 깊지만 초르수바자르보다 규모가 작고 잘 정돈되어 있어서인지 구경하기에 부담이 없었다. 푸릇푸릇한 채소들과 과일들을 보니 당장에라도 폭풍 구매하고 싶었지만, 들고 갈 자신이 없어 주원이가 먹을만한 과일만 몇 개 사기로 했다. 타슈켄트의 민박집에서도 주렁주렁 매달려있던 노란 무화과가 감자처럼 잔뜩 쌓여있었다. 달달한 무화과의 맛에 파리들이 무화과 주변을 들락날락거렸고, 무화과 파는 아저씨는 파리들을 쫓느라, 무화과를 재배치하느라 일일이 손으로 무화과를 만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비싸서 잘 못 먹는 무화과인데, 저렇게 산처럼 무화과가 쌓여있으니 안 먹으면 손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무화과에 익숙하지 않은 주원이는 "무화과 먹을래?"에 도..
- Total
- Today
- Yesterday
- 사마르칸트유대교회당
- 통역
- 카라콜
- 아이와함께여행
- 초르수시장
- 중앙아시아
- 한살림남서울
- 아이와여행
- 첫사랑
- 해외여행
- 전남친
- 타슈켄트
- 우르겐치
- 곡식가루
- 타슈켄트한의원
- 유아차수리
- 밥상살림농업살림생명살림
- 타슈켄트기차박물관
- 우즈베키스탄여행
- 사마르칸트
- 히바
- 재회
- 물품모니터링
- 키르기즈스탄
- 우즈베키스탄
- 부하라
- 키르기스스탄
- 비쉬케크
- 국제연애
- 한며들다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