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그가 원했던 그 순간이 왔다. 아이비에커 앞에 주원이 없이 나 혼자였다. 15년 전 나란히 앉았던 우리가, 타슈켄트 호스텔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모두 잠들기 위해 숙소로 돌아간 밤, 해는 졌고 호스텔의 마당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대화 나누기 딱 적당한 그런 밤이었다. 비록 그가 원하던 그의 차 안이라던지, 어느 음식점이 아닐지는 몰라도. 주원이가 아이비에커로부터 나를 매번 지켜줬듯이, 호스텔 안 너른 마당이 이번에도 나를 지켜주리라. 그의 표정은 매우 지쳐보였다. 내가 원한 건 대화였지만, 그가 원한 건 대화 그 이상이었는지 모른다. 마당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 호스텔의 지붕에서 물 방사형 스프레이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서로 마주 앉은 우리는 침묵속에 지붕에서 흩어져 뿌려지는 미세 물방울들을..
원피스를 입고 화장을 다 한 얼굴로 침대에 가로누워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9시였다. 이미 BB크림은 내 얼굴에 흡수되어 옅어진 지 오래였다. 무슨 힐튼호텔 루프탑인가. 바허며 아이비에커며 나타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 오지 마. 나도 상관없어. 나는 진작에 너희 보러 우즈베키스탄 온 게 아니라고. 나는 처참함을 누르고, 예의와 배려심을 갖추어 문자를 보냈다. "아이비에커, 오늘 너무 늦었다. 무척 바쁜 것 같은데 무리하지마. 다음에 또 보면 되지. 그동안 고마웠어." 눈을 질끔 감았다. 띵동. 그렇게 연락이 없던 아이비에커에게 바로 답장이 왔다. "곧 갈꺼야." 흠... 정말 바빴던 것일까.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너무 늦어서 어디 가지는 ..
"너 또 안 나올 거야?(你又不出来吗?)“ "아냐. 나갈게. 애 맡기고 혼자 나갈게. 저녁에 보자." 아이비에커는 3일 전 혼자 나올 수 있냐는 말을 거절한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인상을 팍 쓰면서 낮은 어조로 말했다. 너 또 안 나올 거야. 그 말에는 나는 너를 소중히 생각했는데, 너는 나를 치한 취급하며 피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나간다고는 했지만, 저녁에 그와 둘이 만날 수는 없었다. 회사를 13년간 다니면서 터득한 기술은 바로, 담당자가 되면 어떻게든 말도 안 되는 숙제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어정쩡한 사정을 풀어야 할 담당자는 내 자신이었다. 바허에게 전화했다. "바허!" "에이~ 은주, 타슈켄트온거야?" 20대 내 우즈베키스탄 절친 바허의 다..
시끌벅적하던 쇼핑몰 푸드코드를 벗어날 때, 나는 이것이 아이비에커와의 15년 만의 재회, 그 마지막임을 믿을 수 없었다. 처참하고, 너덜너덜하고, 또 쇼핑몰 푸드코드 때문에 주위도 산만했다. 내 손에는 아까 내가 먹지 못한 음식들이 비닐봉지에 잔뜩 포장되어 있었다. 다시 주차장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데, 사람이 워낙 많아서 셋이 나란히 걸을 수 없어, 아이비에커가 살짝 앞서갔다. 그러다 문득 나는 주원이의 모자를 푸드코트 식탁 위에 놔두고 온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주원이의 손을 잡고 다시 우리가 앉아있었던 푸드코드 식탁으로 돌아가 모자를 황급히 집어 들었다. 그는 내가 푸드코트 식탁에 다시 갔다 오고 있는 걸 모르는지 여전히 앞만 보고 가고 있었다. 주원이와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
나는 OTT에서 드라마를 볼 때 이상한 습관이 있다. 그건 바로 마지막 편을 먼저 보는 것이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결국 이어지는군, 권선징악의 논리로 마침내 나쁜 사람이 응징을 받는 군, 이들은 헤어지면서 서로를 그리워하는군... 결말을 알고 나면 나는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다시 첫회로 돌아가, 인물들이 마음 졸이고 사건사고를 겪으며 결말에 도달하는 과정을 마음 편하게 관조한다. 지금이야 OTT의 발달로 마우스 드래그 한 번이면 결말 부분을 1초 만에 도달할 수 있지만, 내가 대학생 때는 모든 걸 DVD로 봐야 했으므로 리모컨으로 결말까지 도달하기가 매우 오래 걸렸다. 그래서 그때는 아무리 영상이 길어도 6배속으로 보면서 결말에 이르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보았다. 이런 나는 결말을 미리 볼 수 없..
유아차를 아이비에커 차 트렁크에 실고는 주원이와 나란히 차 뒷좌석에 탑승했다. 아이비에커는 화가 덜 풀렸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는 운전할 때 쓰는 안경을 썼다. 나는 방금 전 당한 일들에 어안이 벙벙해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가리고 심호흡을 했다. "어디 갈래?" 아이비에커가 물었다. 나는 정신줄을 다 잡았다. 오해는 풀고, 웃으며 헤어지고 싶었다. "어디 조용한데 밥 먹으러 갈까" 아이비에커는 잠시 어디 갈지 생각하더니 시동을 걸었다. 나는 아이비에커와 눈도 마주치기 싫어서 운전석 뒤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비에커는 룸미러로 내가 그렇게 있는 모습을 보더니, 말을 하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예를 들어볼께(打个比方). 내가 한국에 갔어. 한국어도 몰라. 처음 가는 장소에서 돈이 다 떨..

경기장에서 나온 우리는 후모 아레나의 외곽을 따라 아이비에커의 차를 향해 걸었다. 유아차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주원이는 소시지빵을 먹고는 기력을 되찾았는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아이비에커 삼촌, 엄마가 아이비에커 삼촌 안경 고장 냈어요." 주원이가 자신의 이름을 2번이나 언급하자, 아이비에커가 미소 지으며 중국어로 나에게 말했다. "엄마? 아이비에커? 은주, 얘가 지금 뭐라고 한거야?" 나는 순간 당황해서 미간을 세우고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가뜩이나 곤란한 하루를 보냈는데, 주원이까지 협조를 안 해주다니. 나는 주원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콕 찍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후~ 주원아. 하필 그 얘기를. 조용히 가자." 아이비에커가 당황한 나의 표정을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얘가 뭐라고 했는데(他说..

난 지지대는 필요 없어 점심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방문객들이 아이스링크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스케이트가 처음인지 성인보조지지대를 손으로 잡고 링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나와 나란히 앉아 2층 관중석에서 링크를 내려다보던 아이비에커가 말했다. "은주, 너는 스케이트 좀 탈 수 있어?" "글쎄. 아주 조금? 잘 못 해." "나는 있잖아. 저 지지대 필요 없어. 내가 모스크바에서 4년 살았잖아. 모스크바는 추워서 아이스링크가 좀 있거든. 거기서 많이 타봤어." 아이비에커는 그때 생각이 나는지 우리도 여기 있을 것이 아니라 저기 내려가서 타자고 했다. 그는 반팔카라티를 입고 있었다. 분명 회사 점심시간에 살짝 나온 것 같은데 무슨 스케이트인가.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너 그렇게 얇게 입고서는 추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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